2021/05/20 12:36

우먼 인 윈도 극장전 (신작)


<이창>의 주인공이 방구석 스파이가 된 것은 그의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이었고, 또 <디스터비아>의 주인공이 그렇게 된 것은 그가 가택 연금에 전자발찌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우먼 인 윈도>의 애나는? 그녀가 집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건 그녀에게 광장 공포증이 있기 때문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공포증의 근원에는 남편과의 이혼, 딸 아이와의 생이별 등이 똬리를 틀고 있고. 하여튼 정신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에 몰린 애나. 그러던 중 그녀는 건너편 이웃집에서 벌어진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근데 이것 참, 이미 예민보스 미친년으로 동네에서 유명한지라 아무도 그녀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고양이까지 키우고 있네? 이거 게임 끝 아니냐고. 나라도 안 믿어줄 모양새로구만.


스포 인 윈도!


냉정히 말해, 미스테리 추리물로써 영화가 잘 빚어지진 못한 것 같다. 주요 배우진들의 개별 연기는 훌륭하지만 그 전체 캐스트의 역할과 몫을 잘 조율해냈느냐-라고 한다면 글쎼. 주요 용의자로 제시되는 건너편 이웃집의 가부장적 남자는 그 얼굴이 게리 올드만이라 오히려 혐의가 옅어지고, 또 애나의 아랫층 세입자는 그 과거사가 너무 직접적이라 오히려 의심을 빗겨간다. 이렇게 하나 둘씩 소거하다 보니 결국 좁혀진 가능성은 딱 둘 정도로 정리 되거든. 별다를 것 없으면서 계속 등장해 애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웃집 건너편의 아들이 범인이든가, 아니면 이 모든 게 그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애나의 환각 또는 편집증이거나. 웃긴 건 결국 영화가 둘 다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애나 환각설 먼저 밀다가 그걸로 페이크 치고 이웃집 아들을 등판시킨 것. 하여튼 관객들과의 추리 대결에서는 영화가 일정부분 판정패한 격.

심지어 가끔 제시되는 애나의 과거에 대한 미스테리 역시 다소 상투적이었다. 남편과 별거하고 이혼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보니 이미 다 죽었다네? 남편이고 딸이고 모두. 그것도 그녀의 잘못으로. 바람을 피움으로써 가족들을 파국으로 이끌었고, 또 직접 운전대를 잡음으로써 남편과 딸 모두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말이다. 관객들이 믿고 의지하던 주인공을 한순간 비호감의 나락으로 떨어뜨려버리는 전개. 그 전개가 아주 신선하다고 할 순 없었으나 충분히 좋았는데, 그럼에도 그 반전 아닌 반전 자체가 너무 뻔했던 것은 또 사실. 솔직하게 말해 이것도 캐스팅의 실패라고 본다. 앤서니 매키 씩이나 되는 배우를 캐스팅 해놓고 수화기 너머 목소리로만 사용한다? 게다가 주인공은 이미 미친년 컨셉이잖아. 딱 답 나오지.

설정부터 발단, 반전을 거쳐 결말까지. 거의 뻔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캐스팅은 남용되고 때때로 산만 해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모든 패를 들켰다는 것. 이 모든 게 이 영화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러나...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재밌게 봤다. 아니, 재밌게 봤다는 것보다는 좋게 봤다-라는 게 맞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를 그나마 좋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감독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 영화엔 조 라이트가 있다.

조 라이트는 우아한 연출자다. 기본적으로 멜로 드라마적 이야기를 잘 푸는 감독인데, <한나>나 <팬> 등을 통해 각각 액션 장르와 판타지 장르에도 손을 뻗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장르적 외도를 할 때마다 팬들은 등을 돌렸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사실 그래서 더 걱정 했었거든. 멜로 드라마 말고 또 미스테리 추리 장르 한다길래. 그러나 이번만은 기우였다. 물론 각본이 좋았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허나 만약 이 영화에 조 라이트 마저 없었다면? 그걸 가정해보면 이번 영화에서 조 라이트의 존재는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일단 조 라이트 특유의 기품있는 프레이밍이 이 영화에는 있다. 집안에만 갇혀 환각과 환청을 보는 인물의 내면을, 조 라이트는 아름답고 유려하게 포착 해낸다. 뱀처럼 기민하게 카메라를 움직이고, 더치 앵글의 주된 활용을 통해 애나의 기울어진 내면을 들춰내는 촬영. 여기에 애나를 따라 같이 흔들의자에 앉기라도 한 듯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기울어지는 카메라의 무빙은 그 자체로 미학적이다. 그리고 애나의 과거 미스테리가 풀리는 장면에서의 묘사도 <이제 그만 끝낼까 해>가 떠오르며 관객들을 차분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잘 찍었다. 여기에 편집도 잘함. 건너편 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갑자기 내 눈 앞으로 확 다가온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프레임 바깥에서 안으로 침투하는 피사체의 타이밍과 크기를 모두 계산 해낸 영민한 편집. 이 정도라면 영화를 심폐소생 시킨 거 맞지.

근데 또 그래서 그런 걸까? 인물의 파편화 된 내면을 담아낸 방식이 좋지만, 그 모든 게 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본격 살인극이 펼쳐지는 결말부 부터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증발한다. 더 이상 인물의 내면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거지. 장대비가 빗발치는 밤에 옥상에서 벌어지는 주인공과 살인마의 혈투가 더 중요하다는 거지. 그래서 영화의 결말부가 뻥 뚫려있는 듯한 인상이다. 애매하게 꼬여있던 걸 가까스로 잘 풀어내다가 막판 들어서 다 놓아버린 느낌. 마무리까지 잘 해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감히 히치콕의 <이창>에 비벼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먼 인 윈도>는, 조 라이트라는 연출자를 우리들 가슴에 새기고야 만다. 때때로 모자라고, 또 가끔은 넘치지만 그럼에도 조 라이트라는 이름만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어정쩡하게 히치콕 리메이크 했던 최근의 <레베카> 보다는, 차라리 이런 식의 히치콕 워너비가 더 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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