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장지가 얼마나 휘황찬란 했던가. <새벽의 저주>로 좀비 장르에 새 이정표를 세웠던 비주얼리스트 잭 스나이더 연출, 연출과 표현 수위에 있어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넷플릭스, 9000만 달러라는 고가의 제작비, 여기에 전략을 짜고 무기를 쓰고 심지어는 일종의 어떤 문화까지 형성하는 신(新) 좀비 묘사. 심지어 제목은 '죽은 자들의 군대'. 죽은 자들의 땅도, 죽은 자들의 새벽도 아닌 죽은 자들의 '군대'! 이 정도면 갖다 붙일 수 있는 포장지란 포장지는 죄다 썼다 봐야지.
런닝타임이 자그마치 두 시간 반이다. 넷플릭스에서 처음 재생 버튼을 누를 땐 '이걸 언제 다 보지?'라며 전전긍긍 했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이었던 건, 영화를 보는동안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았었다는 것. 난 또 그래서 이 영화 재밌는 줄 알았지. 그런데 다 끝나고 나서 곰곰이 돌이켜보니, 흥분되는 순간들 보다 의문스럽고 짜증나는 순간들이 훨씬 더 많더라고. 그러니까 무난히 즐길 수 있는 영화인 것도 맞지만, 휘황찬란한 포장지로 홍보 해놓은 것에 비하면 정작 그 안의 내용물이 너무 뻔하고 올드해서 당황스러운 영화인 것도 맞다.
자기가 설정 해놓은 좋은 설정들을 지가 냅다 걷어차버린다. 좀비들의 군대? 오프닝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다 조져지고 정작 본편에 나오는 물량은 <월드 워 Z>보다 적다. 예고편에 나와 나름의 위엄을 선보였던 좀비 호랑이? 후까시만 잔뜩 잡다가 트롤러 딱 하나랑 어설프게 맞다이 까고 퇴장함. 똑똑한 뉴타입 좀비들의 등장? 좀비들의 왕인 제우스 한 개체 정도를 빼면 솔직히 다른 좀비 영화 속 좀비들과 뭐가 다른 놈들인지 잘 모르겠다. 좀비들 때려잡으면서 무선 헤드셋 끼고 음악 감상하던 미친 컨셉의 주인공들? 그거 다 인물들의 환상 속 장면일 뿐이었음.
재밌어 보이는 요소들을 잔뜩 설정해놓고도 써먹지를 않는다. 그리고 그 아쉬운 빈 구멍들을 메꾼답시고 넣은 게 죄다 기존 좀비 영화들에서 질리도록 보아왔던 클리셰들. 가족 드라마를 첨가하기 위해 넣은 것이겠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발암물질 급의 존재로만 남은 주인공의 딸이라든가, 자기 페이스 확실한 엉뚱미 오타쿠라든가 하나같이 다 어디서 보았던 것들. 여기에 나머지 설정들 중에서도 개연성과 현실성을 해치는 게 많다. 독특한 캐릭터들로 꾸려낸 영화처럼 홍보 했으면서 정작 그들에게 제대로된 사연이 붙어있는가는 또 의문. 주인공의 팀원 리크루트 과정은 얼렁뚱땅 진행되고, 또 그들 대부분이 다 예스맨인지라 OK를 연발하며 전개된다. 차라리 "난 내 인생이 진짜 싫거든"이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작전에 참가한 헬기 조종사가 더 그럴듯해 보일 지경.
그래, 캐릭터와 플롯에 개연성이 모자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건 잭 스나이더의 영화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잭 스나이더.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오직 액션 아니겠나. 그럼 액션은 어떠한데? 액션도 큰 일이다. 일단 두 시간 반이나 되는 런닝타임에서 액션이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이 그리 많질 않다. 아마 잭 스나이더의 필모그래피를 통 틀어 액션이 가장 적은 작품일 것. 그나마도 다 어디서 본 것들이고, 그걸 잭 스나이더 스타일로 멋드러지게 찍어낸 부분도 별로 없다. 그리고 라스베가스를 주 배경으로 삼은 영화답게 급한 결혼과 카 섹스, 돈, 강탈 등등 욕망에 대한 뉘앙스를 자꾸 반복하던데 그게 이 영화의 미쳤어야만 했던 분위기와 잘 맞아들어갔는지도 의문이고.
다시 말하지만 한 번쯤 볼만한 영화이긴 하다. 그러나 들인 노력과 이름값에 비해서는 아쉽다는 거지. 황금빛 포장지로 둘러놨으면 뭘해, 정작 그 내용물이 벽돌인데. 이 정도면 잭 스나이더도 한 번쯤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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