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8 14:40

유령수업, 1988 대여점 (구작)


팀 버튼의 출세작이자, 그만의 세계를 향한 찬란하고 기괴한 이정표. 원래는 원제 대신 수입개봉명을 따로 만드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이 영화는 원제보다 <유령수업>이라는 제목이 훨씬 더 나은 것 같다. 비틀쥬스가 존나 쩌는 존재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본편에서 등장하는 물리적 분량은 그리 크지 않거든. 주인공 부부가 죽음 이후 유령으로서 겪게 되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이 대부분의 내용이기 때문에, <유령수업>이라는 제목이 썩 맘에 든다. 

현존하는 유명 감독들 중 인상주의로 루카 구아다니노, 사실주의로는 크리스토퍼 놀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이어 대표적인 표현주의 감독으론 팀 버튼을 꼽아야 하겠지. 그 특유의 표현주의적 색채는 이 영화에서 시작되었고, 또 곧바로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팀 버튼은 소위 말해 '질감이 중요한' 감독처럼 느껴진다. 극중 인물들의 감정이나 주제를 표현주의적으로 왜곡해서 표현해내는 스타일이니, 결국 세트 등을 비롯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소품 등의 미술이 중요한 감독인 것.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부터 최근작 <덤보>까지는 그 요소들이 모두 그린 스크린과 CG의 몫이었다. 깔끔하고 번지르르해 그 자체로 나쁘다곤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특유의 질감까지는 돋보이지 못한다는 것. 고로 질감이 중요한 팀 버튼 세계에서 CG는 그를 무너뜨리는 안티 테제다. 

바로 그 점에서 <유령수업>은 팀 버튼 고유의 미학을 돋보이게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으로 손수 꾸며낸 프로덕션 디자인,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장인의 손길로 따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그리고 이 모든 기술적 미학적 요소들에 화룡점정처럼 더해지는 팀 버튼 특유의 주제와 분위기. 어쩌면 팀 버튼은 시작부터 완성형 감독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허공 위의 붕 뜬 문은 이후 길예르모 델토로 등의 감독들에 의해 리바이벌 되는 느낌이고, 겉의 입 안에 또다른 입을 지닌 샌드웜의 존재는 일본 특촬물에서 많이 봤던 디자인. 어찌되었든 유령과 사후 세계를 다루는 오컬트 요소 중심의 영화이기도 한데, 그 점에서 운명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미니어쳐 활강 오프닝 시퀀스도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분위기는 정반대지만 <유전>도 이런 태도 갖고 있잖나.

팀 버튼의 세계에서는 죽음조차 동화가 된다. 별다른 복선없이 곧바로 죽어버리는 주인공 부부, 하필 죽음의 순간 그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는 정말이지 클래식하고 예쁜 노란 자동차였다. 그들이 죽은 교량 역시 너무나도 예쁜 빨간색. 여기에 어찌보면 그들을 죽였다고도 할 수 있을 거리의 강아지는 무슨 찰리 채플린 콩트 마냥 시소 한 방에 1타 2피로 부부를 요단강 익스프레스 태운다. 주인공이 거의 등장하자마자 죽는 것도 넌센스인데 그 분위기마저 동화같고 예뻐서 할 말을 잃게 됨. 그리고 사실, 죽음 이후 유령이 된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죽는 것도 꽤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아, 이거 팀 버튼 영화 맞구나.

아이를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부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진정한 딸을 얻었고, 또 자신에게 온전한 관심을 줄 부모를 원하던 소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진정한 부모를 얻었다. 어찌보면 성별만 다를 뿐 위노나 라이더의 소녀 캐릭터는 팀 버튼 자신의 오너캐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결과론적으로는 죽음을 곁에 두어 더 큰 행복을 얻게 되는 모습이 팀 버튼 스스로의 소망인 것 같아 재미있기도. 물론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유령이라 좋았던 건 아닐테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해줄 만한 존재를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이겠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도 아니고 심지어 등장하는 물리적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제목을 꿰차고 있는 마이클 키튼의 비틀쥬스. 캐릭터 자체도 재미있게 방점 찍혀 있는 인물이지만, 다른 거 다 떠나서 그냥 마이클 키튼이 신나게 연기하고 있단 생각 밖에 안 든다. 그래서 더 정이 가는 것도 있고. 근데 어린 시절 봤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이 캐릭터 설정 진짜 병맛인 동시에 현실적이네, 이거. 

전체적으로 잘 만든 영화, 그리고 팀 버튼 월드로 가는 1차 티켓. 그러나 보는내내 제일 대단하게 느껴졌던 건, 이 감독과 저 비틀쥬스 역할의 배우를 데리고 배트맨 영화를 찍기로 결심 했던 워너 제작자들의 태도였다. 좋은 영화인 건 맞는데 어느 구석을 봐도 일반적인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들과는 좀 괴리가 있잖나. 게다가 다른 수퍼히어로도 아니고 배트맨인데! 그래... 팀 버튼은 이해할 수라도 있지... 마이클 키튼을 브루스 웨인으로 기용한 건 대체 뭔 깡이었을까. 워낙 연기력이 출중하고 열정이 충만한 배우라 뭐든 다 씹어먹을 수 있는 상태였겠지만 그래도 이 비틀쥬스 이미지 하나 만을 보고 브루스 웨인으로 데려오다니... 조커도 아니고 브루스 웨인으로... 옛날에 사극에나 퀴어 요소까지 가미되어 있었던 <왕의 남자> 제작 투자한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쪽 못지 않게 이쪽도 예사롭진 않은 것 같다. 

덧글

  • rumic71 2021/05/28 19:08 # 답글

    그리고 데려온 결과가 정말 대성공이었죠. 흥행 떠나서.
  • dj898 2021/06/01 12:03 # 답글

    뭐 지금도 영화판 배트맨의 넘사벽이 팀 버튼의 배트맨 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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