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18:04

파이프라인 극장전 (신작)


<도굴> 이야기를 하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굴이란 소재를 다루겠다 공언 했으니, 결국 관객들은 그 도굴이라는 소재가 가진 디테일들을 궁금해하고 기대했을 거란 말. 불법이긴 하지만 도굴이 어떤 과정으로 준비되고 전개되는지, 도굴꾼들 사이의 행동양식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은어는 무엇인지, 도굴을 함에 있어서 주의해야할 것들은 무엇인지 등등의 디테일. 허나 <도굴>은 그딴 거 그냥 다 팽해버리고 결국 도굴꾼 스킨만 씌운채 구태의연하게 반복되는 전형적인 한국형 하이스트 영화였다. 그리고 그 <도굴>이 개봉되고 근 반 년만에, 그 실수를 그대로 반복한 영화가 다시금 등장했다. 아니, 어쩌면 <파이프라인>은 <도굴>보다도 못한 영화일 것이다. 


스포일러라인!


도유꾼. 살다가 쉽게 들어볼 수 없는 직업군이다. 영화의 설명대로라면 도유꾼은 지하의 송유관을 찾아내 나름의 기술로 거기서 기름을 추출해 훔치는 직업군이다. 자, 도굴 행위에 이어 여전히 불법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관객으로서 궁금해지는 부분은 어디인가. 밑줄 한 번 쳐보자고. 당연히 '나름의 기술' 아냐? 고로 도유꾼들이 어떤 방식으로 기름 추출을 준비하고 실행 하는지, 그렇게 훔쳐낸 기름은 어떻게 보관하고 관리하다 현물화 시키는지 등등. 이런 거 했어야지. 그런 거 하다보면 자연스레 도유꾼들 사이의 행동양식이나 은어들이 나오겠지. 근데 <파이프라인>은?

<파이프라인>은 영화 중반까지 내내 땅만 판다. 그냥 땅만 죽어라 판다. 물론 보통은 송유관이 지하에 있으니 땅 파는 게 맞는 묘사이긴 하겠지. 근데 그 파는 과정이 너무 무식하기만 하다. 도유꾼들은 도굴범들 못지않게 땅파는 게 중요한 놈들 아니냐? 그러나 <파이프라인>은 그런 디테일들을 전혀 살려내지 못한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땅만 판다. 심지어 그 사이사이를 그럴듯한 액션이나 재미있는 유머로 채워넣은 것도 아니다. 음문석이 연기한 캐릭터의 허둥대는 개그는 웃음 대신 실소와 비웃음을 불러 일으키고, 세상에 유일무이한 최고 기술의 도유꾼으로 묘사 됨에도 불구하고 서인국의 주인공 캐릭터는 제대로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다. 제대로 보여주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허세만 엄청 부린다. '나는 밥값을 하니까'라는 스탠스를 계속 취하는데, 말로만 그러지 말고 그럼 행동으로 보여주라고 좀.

하이스트 영화면서 팀을 제대로 꾸려낸 것도 아니다. 각 캐릭터들의 능력은 뭉뚱 그려놓고 흔하디 흔하고 또 뻔하디 뻔한 사연들만 이상하게 부풀려 놓았다. 유승목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망 플래그를 줄줄이 꽂아넣고 있는데, 그렇다고 캐릭터로서 매력을 강력하게 심어둔 건 또 아니라서 막상 죽어도 별 생각이 안 든다. 눈물은 커녕 그냥 인상만 찌푸려지게 됨. 무식하지만 정 많고 힘이 센 삽질형 캐릭터로 설정된 태항호의 큰삽 역시 마찬가지. 주인공과 악당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했어야 했던 배다빈의 카운터 캐릭터는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최악이고.

악당 이야기 나온 김에. <베테랑>을 통해 유아인이 하나의 큰 이정표를 세운 이후, 젊은 재벌 악당 캐릭터는 수도없이 리바이벌 되어 왔다. 그러니까 정말 새롭게, 정말 재미있게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안 하는 게 나은 상황이란 말. <파이프라인>은 패기인지 객기인지 그것도 받아들였는데, 이수혁이 연기한 악당 또한 재고의 여지가 없다. 연기의 톤 앤 매너도 문제지만, 캐릭터가 너무 상투적이다. 사실 상투적이고 식상한 건 주인공과 그 크루원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거긴 나름 주인공 진영이라 그냥 스테레오 타입으로 납득되는 게 있거든? 그렇지만 이수혁의 악당은 아니다. 캐릭터가 너무 돌출되어 있는데 잔잔바리 악당도 아니고 뭔 테러리스트 가깝게 묘사되어서 더 부담스러움.

영화 중반까지는 극중 인물들이 삽질하고, 또 그 중반부터 후반까지는 영화가 내내 삽질하는 느낌. 말그대로 삽질하는 영화. 그리고 여기에 느낌표를 찍어주는 건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올라오는 메이킹 영상... 이럴 거면 차라리 극중 인물들의 후일담을 넣어... 아니면 하다못해 성룡처럼 NG 장면을 넣으라고... <파이프라인>은 배우들끼리 촬영 현장에서 재미로 찍은 스마트폰 카메라 동영상을 조악하게 편집해내 붙여넣었다. 진짜다. 배우들이 캐릭터로서 다시 출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배우 본인으로서 출연해 춤을 추고 엽기 표정을 지으며 아스트랄한 영상을 선사한다. 유하 감독님... 전작 이후로 좀 오래 쉬셨으니 영화적 퀄리티가 조금 나쁜 건 이해되지만, 그래도 엔딩 크레딧의 이 영상을 뺄 수 없었을 정도로 제작 권력이 없으셨나요...? 아니면 정말로 그걸 재밌다고 생각해서 직접 넣으신 건가요...? 둘중 무엇이든 간에 도무지 용서 해드릴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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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t;파이프라인&gt;</a> (유하) 한국에서 만들어진 하이스트 영화로써도 최악이지만, 유하라는 한때 명감독이었던 연출자의 현재가 처량한 것만 같아 더욱 쓸쓸. 영화적 재미도 없고, 감독이 다듬은 연출적 묘도 없다. 하지만 가장 최악인 것은, 영화의 에필로그로 남은 엔딩 크레딧 영상. 극중 인물들에 대한 그나마의 몰입감을 완전히 헤쳐버리는 최악의 영상이었다. 그 몇분 여의 영상은 두 시간짜리 본편에 주는 절정의 모욕이었고, 그야말로 제 얼굴의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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