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5 14:04

크루엘라 극장전 (신작)


히스 레져의 얼굴을 한 조커는 광기가 중력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었다. 광기에 한 번 물들기 시작하면 그것은 속도가 붙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조커는 또 말했지, 그러니까 그저 조금만 밀어주면 되는 거라고. 벼랑 끝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그 대상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광기를 향해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비록 국내 개봉 당시 한국어 번역은 그 '중력'을 '가속도'로 바꿔 의역 했지만, 어쨌거나 한 번 시작되면 속도가 붙는단 소리이니 중력이나 가속도나 조커 옹의 가르침을 전수 받기에 큰 오해는 없었다고 해야겠다. 조커 옹의 결론은, 결국 광기의 속도에 탄력이 붙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 선배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살짝 밀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게 조커 교수님의 광기학개론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을 토대로 보았을 때, 악녀 크루엘라의 일대기는 흥미롭다. 물론 여전히 다 가짜 광기처럼 보이기는 해. 진짜 미치지도, 진짜 나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든 악녀가 되고 싶어 발악하는 느낌이 아쉽다. 그러나 그건 제작사가 디즈니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을 터. 때문에 그 부분을 빼고 봤을 때 흥미로워지는 건 크루엘라의 광기가 어디서부터 연유 했는지를 찾아 나서는 영화의 과정이다. 중반까지만 해도 그 광기는 뭐랄까, 후천적인 것처럼 보이거든. 광기의 멘토로 삼을 다른 누군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을 크루엘라가 그대로 이어가는 느낌. 그런데 영화는 중후반부 나름의 반전을 통해, 그 광기의 후천성을 선천성과 함께 붙여 놓는다. 광기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광기를 향해 가는 길로는 누가 밀어주는 것인가. <크루엘라>가 흥미를 돋우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안녕, 잔인한 스포일러.


영화는 명백하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구성을 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영화의 주인공인 앤 헤서웨이는 결국 악녀 메릴 스트립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며 끝났던 것으로 안다. 근데 만약 그녀가 메릴 스트립의 유지를 이어 갔더라면? 자기가 그녀에게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돌려주고, 또 똑같이 행동했더라면? <크루엘라>의 크루엘라가 딱 그 길을 가지. 자신을 괴롭혔고, 또 근본적으로는 장기적인 고통까지 주었던 바로네스가 걷던 길을 자신 역시 그대로 가니까. 때문에 앞서 이야기했듯, 영화 중반까지는 그게 후천적인 광기처럼 보인다. 크루엘라 그녀의 상황이 그랬고, 보고 배운 게 그 뿐이었으며, 또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했기에. 

재밌는 건 반전이 밝혀지고 나서부터다. 아, 개인적으로 그 반전이 정말 반전으로써 제값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자체로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며, 무엇보다 관객으로서 충분히 예측가능한 범주 안의 비틀기였다. 그러니까 영화적 재미로만 봤을 때는 어쩌면 실패한 반전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광기를 탐구하는 영화의 주제로 봤을 때는 충분히 흥미로운 반전이다. 그렇다, 일단 바로네스의 정체. 그녀는 크루엘라의 생모였던 것이다. 한국의 막장 드라마들을 떠올리게 하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여기서 영화의 메시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보고 배운 광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게 유전자에 각인된 선천적 광기이기도 하단 소리지. 게다가 그 비밀을 서로 알게 된 이후에도, 엄마는 딸을 죽이려 들고 또 딸은 엄마를 고꾸라뜨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하물며 짐승의 세계에도 부모자식 간의 정과 책임이 있거늘, 이쯤 되면 광기는 인간을 짐승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마법의 힘이다.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 쌍 엠마 체제가 견고한데 특히나 엠마 스톤의 활약에 눈이 부시다.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연기를 못하는 배우다-라는 생각은 안 했었지만, 그럼에도 감탄을 한 경우는 별로 없었지. 그랬던 그녀가 <크루엘라>에서는 타이틀 롤로서 자신의 연기를 업계에 증명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영화의 감정적인 클라이막스 부분, 분수 앞에서 그녀가 나지막히 독백을 하는 장면이 있다. 거대 규모의 할리우드 상업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감독인 크레이그 질레스피는 그 부분을 핸드 헬드 롱 테이크로 담아냈다. 그리고 엠마 스톤은 여지없이 그 쇼트를 따먹는다.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3분이라는 나름의 긴 시간동안 주연 배우의 얼굴만이 오롯이 담기는 상황에서,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다. 그러나 엠마 스톤의 그 3분은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다이나믹하다. 배우의 표정이 스펙터클로 작용할 때가 이렇게 종종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의미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떠오를 정도로 영화의 의상 디자인이 화려하다. 패션을 소재로 한 주인공과 악당 사이의 다툼이다 보니 이는 어쩌면 당연했던 것. 더불어 7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서 그 당시의 건물이나 자동차, 화장법 등 역시 비교적 잘 고증을 해놓은 편. 여기에 당시 브릿팝, 브릿락도 곁들어지고. 당시 런던에 관심이 많든 관객들이라면 잘 정돈된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나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다. 

이야기는 전형적이었고, 반전이랍시고 준비한 비틀기는 상투적이었으며, 미친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홍보한 것 치고는 어째 덜 미치고 덜 나쁜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크루엘라>는 준수한 디즈니표 실사화다. <라이온 킹>처럼 아무런 재해석도 없이 그저 원작을 복사 + 붙여넣기 하거나, 아니면 <뮬란>처럼 원작에도 못미치는 어정쩡한 퀄리티로 나오거나. 그동안의 디즈니 실사 리메이크 영화들이 대부분 다 그래왔지. 바로 그렇기에, <크루엘라>는 독특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지만, 최소 이 정도의 퀄리티로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앞으로의 디즈니 실사 리메이크 영화들에도 희망이 있다고 나는 분명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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