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오바디스' 또는 '쿼바디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경구들 중 하나일 것으로, 그 뜻은 '(신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정도가 될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로 갈 수 있을지를 몰라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주인공 아이다를 담은 영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면서도, 신의 존재를 믿는다해도 바로 그 순간에는 그가 부재 했다고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생경하게 동분서주하는 비극.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우리를 내전 당시의 보스니아로 데려간다.
연방 국가 유고슬라비아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한다. 세르비아계로부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독립 했으니 이제는 보스니아 차례. 그러나 슬로베니아계 위주였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계 위주였던 크로아티아와는 달리, 보스니아는 슬로베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심지어는 세르비아계도 섞여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내전이 벌어진다. 그곳이 자신들의 땅임을 믿고 빼앗기지 않으려드는 세르비아계와, 그런 그들로부터 떨어져나가려는 나머지 사람들의 싸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항상 그랬듯이, 이 싸움은 무고한 많은 자들이 흘린 피의 붉은색을 점점 더 선명케하고, 점점 더 진하게 만드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한가운데에, 우리의 아이다가 있다. 세르비아 군대와 대치중인 UN군의 주둔지.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장사진을 이룬다. 이상적으로라면 피난민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받아줘야 맞는 거겠지.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훨씬 더 냉혹한 법. 그들 모두를 들인다면 관리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주둔지의 공간 내부 인구는 이미 과포화에 이르렀다. 그들을 관리할 만한 인력 역시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다 들여 보호한다면 좋을 테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들어온다면 그만큼의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그렇게 UN군 주둔지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가장 중요한 것이 두가지 있다. 첫번째, 세르비아 군의 폭력성. 그들은 무장과 비무장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죽이려 든다. 여성들은 강간의 희생자가 되고, 남성들은 총살로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탱크까지 몰고 돌격하는 세르비아 군대 앞에서 자비를 구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두번째. 나는 사실 이 두번째 요소에 훨씬 더 화가 많이 난다. 바로 UN군의 무능함. UN군은 결국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한다.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보호하지도, 막대하고 강력한 무력으로 세르비아 군과 맞서지도. 지휘 계통은 먹통이며 뉴욕에 위치한 UN 본부는 대서양 건너 일이라는 건지 뭔지 무관심하다. 소속 군인들은 모두 어리고 전투 경험이 없으며, 심지어는 적에게 모욕 당해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처지다. 아, 이 둘 중 무엇이 더 나쁜 것일까.
모두가 죽더라도 자신의 주둔지를 지키며 적 앞에서 결사항전의 태도를 보이는 게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UN군은 군인으로서의 최소한도 해내지 못한다. 주둔지 내부의 피난민들 중에서 반동분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겠다는 세르비아 군 앞에서 그들은 그저 벌벌 떨 뿐이다. 그래도 명색이 군대인데, 무장 상태의 적군이 자신의 주둔지 내부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터무니 없는 요구를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결국 들어준다. 오히려 그 안의 피난민들에게 식량으로 빵을 나눠주는 것도 세르비아 군이다. 바로 여기에서 분통이 터진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고, 힘 없는 정의는 무능이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세르비아 군대와 UN군을 통해 그 모두의 확실한 예시가 되어준다.
그리고 <쿠오바디스, 아이다>의 이런 묘사는, 바로 지금 현재의 미얀마 상황과 공명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각자의 이권을 위해 뒷짐만 지고 있는 동안에, 결국 UN은 미얀마로 군을 파견하지 못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죽었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물론 끝까지 버티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기에, 난 언젠가 미얀마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들 스스로의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말은 현재의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앞에선 그저 그림의 떡 같은 안일한 소리일 뿐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한 명 한 명의 개인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한 명 한 명의 앉아있는 피난민들, 전쟁이 벌어지기 전 행복했던 한 명 한 명의 시민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울음을 토해내거나 눈물을 흘려낼 새도 없었던 한 명 한 명의 남성들. 그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목도해내려는 카메라. <쿠오바디스, 아이다>의 그런 태도는 그 당시 그 한 명 한 명 개인의 삶들을 지금 영화관 속 관객들의 마음에 흡사 위령제를 하는 듯이 데려온다.
나는 아마 이 영화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아이다가 겨우 남겨진 집으로 돌아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장면, 그것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상황에서 집이라도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추억이 묻어있는 그 집에 홀로 남은 것이, 오히려 무거운 형벌처럼 느껴지진 않을까? 신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어디로 가시며, 그 때는 어디에 계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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