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1 21:43

캐시 트럭 극장전 (신작)


장르로만 따지면 누가봐도 가이 리치 나와바리인데, 분위기와 전개의 형식으로만 또 따지면 가이 리치에서 살짝 벗어난 듯한 느낌이 좀 있다. 사람 죽어나가고, 말꼬리 흐리고, 이거 말했다 저거 말했다 와리가리 떠는 건 영락없는 가이 리치지만 말수가 좀 적고, 비교적 덜 산만하고, 무엇보다 건조하다는 점 등이 아무리 봐도 기존 가이 리치와는 좀 다른 인상. 절제 하다가도 절제 못한 것 같고, 또 절제 못한 것 같다가도 절제한 것 같은 오묘한 느낌. 


스포 트럭!


영화의 시작은 현금 수송 차량을 습격하는 범죄자들의 모습이다. 근데 어째 수상한 게, 사건의 전체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는 커녕 한정된 앵글과 한정된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오히려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스탠스를 취한다는 것. 거기서 부터 우린 이미 알 수 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각자의 미스테리를 가진채 가이 리치 스타일로 종횡무진 날아다니겠구나.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추측이었다. 일단 숨길대로 숨긴 이 주요 사건의 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며 전개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올바른 추측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각 인물들이 종횡무진 날아다니질 못한다. 그 점에 있어서는 틀린 추측이었어. 요점을 정리하면 이거다. 스릴 넘치던 전쟁터를 그리워하는 전직 미군들이 주도면밀한 면모로 현금 수송 차량을 덮치는데, 우연히 그 근처에 있다가 억울하게 죽은 소년의 아버지가 힘있는 범죄조직의 두목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놈들을 찾아 도륙내기 위해 도시 곳곳을 이잡듯 뒤지고 다녔다는 것. 그러다 별 소득이 없자, 결국 자기 자신이 이력을 숨긴채 보안 업체에 취직해 직접 그 놈들을 찾아나섰다는 것. 물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아버지의 얼굴이 제이슨 스타뎀이라는 것이겠지. 

이야기는 단순한 복수극이고, 사실 중반까지 보면 영화가 숨기고 있던 대부분의 패들은 안 봐도 비디오인 상태가 된다. 다만 여기서 영화가 클리셰를 깨부수는 방식이 좀 특이하다. <테이큰>과 비슷한 류의 일반적인 복수극이었다면, 게다가 주인공의 얼굴이 제이슨 스타뎀의 생김새라면 그냥 주인공 하나만 믿고 우직하게 돌격 해도 된다. 관객들에게 악당을 소개할지언정, 이 새끼가 얼마나 나쁜 새끼인지만 가볍게 언급해도 별 문제가 없다. 그게 오히려 경제적이지. 그러나 <캐시 트럭>은 타란티노의 복수극들 마냥 악당들에게도 사연을 부여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물리적 비중을 주인공과 거의 대등하게 묘사해두었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다보면 누구에게 감정 이입해야할지가 좀 난감 해진다. 물론 무고한 어린 소년을 죽인 범죄자들? 당연히 죽어 마땅해 보이지. 근데 그렇게 따지면 주인공인 H도 만만찮게 죽어 마땅한 인물이다. 그는 이미 범죄조직의 두목이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놈들을 찾겠답시고 여러 추가적인 살인들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채 저질렀다. 그와중 그래도 주인공이긴 한지라 성착취 당한 미성년자들을 구해주는 것처럼 나름 묘사해두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쪽도 저쪽 못지 않게 잔인무도한 범죄자란 사실. 

영화가 이런 태도를 취하다보니, 결국 이건 감정주의적인 타란티노의 스타일이 아니라 냉정하고 또 비정한 마틴 스콜세지 스타일의 하드보일드 타입이 아닌가 싶어진다. 극중 그 어떤 인물들에게도 관객들이 쉽사리 완벽한 감정이입을 할 수 없게끔 거리를 두게한 형식. 이 놈 말만 들었을 땐 저 놈들이 썩을 놈들 같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팔짱 끼고 보면 실은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 매한가지였다는 관점. 영웅은 커녕 놈들은 다 범죄자일 뿐이란 진실. <캐시 트럭>에서 가이 리치가 취하는 태도는 바로 그런 자세다. 그래서 극중 죽게 되는 몇몇 인물들은 그 최후가 상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담당 배우의 유명세나 영화 속 물리적 비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정말로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 같은 느낌도 난다. 

<킹 아서 - 제왕의 검>이나 <알라딘>에서는 좀 덜했었지만, 최근작인 <젠틀맨>에서 가이 리치는 그 특유의 현란한 교차 편집과 시점 변화로 나름의 작가주의적 재미를 뽐냈던 감독이다. 그런데 이번 <캐시 트럭>은 또 그게 덜하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결국엔 다시 이리로 돌아온 뒤 이번에는 그리로 튀어버리던 그의 산만하다면 산만 하다고 할 수 있을 스타일, 그게 이번 영화에는 좀 중화된채로 표현되어 있다. 시점 변화는 크게 두 번 정도 뿐.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함께 진행된 첫번째 순행과, H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과거 이야기, 그리고 H의 아들을 죽인 범죄자들 이야기가 이어 붙고. 기존 가이 리치의 모습에 비하면 여러모로 좀 덜 과격하지. 다만 기왕 절제할 거 아예 좀 더 절제 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기껏 첫번째 순행에 몸을 싣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이 더 추가되지 않나. 그리고 그 두 가지 관점을 묘사한 시퀀스들이 짧은 것도 아니다. H의 과거가 체감상 20분 정도, 또 이어지는 범죄자들의 이야기가 체감상 역시 20분 정도. 그러니까 이미 몰입되어 있던 기존의 이야기에 대한 흥미가 깨져 버린다. 해당하는 각 시퀀스들을 좀 더 요약해 편집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가이 리치가 기존에 갖고 있던 스타일과 비교해 이야기 하느라 좀 길어졌는데, 어쨌거나 가이 리치답게 재미있는 킬링 타임용 영화인 것 또한 사실이다. 조쉬 하트넷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고, 제이슨 스타뎀은 여전히 멋지더라. 뜬금없이 튀어나온 앤디 가르시아 역시 짧지만 좋았고. 특별 언급으로, 스콧 이스트우드 존나 잘생겼던데. 난 이 사람 나오는 영화 여러 편 봤음에도 그동안 항상 뭔가 밍밍한 느낌이었거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그랬나... 하여튼 이번 영화에서는 굉장히 멋지게 나옴. 불안불안한 또라이 캐릭터였던 데다가 그 최후까지 좀 허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몇 장면에서는 그냥 존나 간지더라. 금수저, 은수저 말고 최고의 유전자수저임.

덧글

  • 로그온티어 2021/07/30 04:45 # 삭제 답글

    저는 개인적으로 니콜라스 빈딩레픈의 작품들이 떠올랐습니다. 요란함보다는 많이 고요해진데다, (관찰하듯 바라보는 느낌) 정지된 화면 안에 캐릭터들의 적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좀 있다보니 니콜라스 빈딩레픈 작품이 떠오른 거에요. 빈딩레픈의 작품은 too old to die young에 나왔던 흑인배우도 나와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가이리치 화법이 중화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만만 찮았다고 생각해요. 초기 사건을 다양한 관점과 시점에서 수번을 묘사하며 덧칠하는 짓(...)을 했고, 후반 총격전은 솔직히 정보가 너무 많지요. 그러니까 보면서 한번에 갈 수 있는 걸 쓸데없이 다시 얘기하고 덧칠하고 꼬아놓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정작 볼때는 그런 생각 들지 않지만.)

    후반 총격전에서는 용의자들의 작전 설명, 용의자들의 입장, 아이러니, 다양한 캐릭터들의 상황, 허무한 결말, 주인공의 상황들이 뒤엉키잖아요. 그런데 이 사실들이 산만하지 않고 튀지 않고 자연스레 들어왔다는 점이 인상깊게 다가 왔습니다. 단지, 그동안 가이리치 영화는 과장해서 반전이나 아이러니를 묘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툭 던지듯이 묘사하니까, 전보다 안 고여보였던 게 아닐까...

    그나저나 주인공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허무주의적 표현은 [마약전쟁] 생각났습니다.

    "범죄에도 품격이 있다"라는 젠틀맨의 주제를 잇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욕망만 좇는 범죄자가 사고를 치고, 그 범죄자가 동료도 죽이지만 결국 자신의 명줄을 앞당기는 일을 만들어버리는 한편, 그나마 품격과 인정이 있는(?) 주인공이 그를 잡으니까요. 그러니까 범죄자든 경찰이든 짬을 품격있게 먹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근데 가이리치 세계관이 그러하다면 그 세계관에서 저는 절명할 것 같
  • CINEKOON 2021/08/09 13:20 #

    짬의 품격. 맞는 말이네요. 무언가를 오래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자기만의 방식이 생기죠. 그게 결국엔 뉴비가 봤을 때 실력이 되고 또 품격처럼 보이는 거고...

    우리 짬 열심히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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