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대해 충분한 흥미가 있었음에도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는 영 손이 가지 않았다. 좋은 드라마란 이야기 많이 들었고, 또 분명 그럴 테지만 어쨌거나 영화 말고 TV 시리즈 또는 드라마처럼 연속물 매체에는 적응이 영 어려웠던 터라... 그런데 이번에 꼭 봐야만 하는 상황이 생겨서 큰 맘 먹고 관람. 뭐, 어느정도 예상했던 부분이긴 하지만 역시나 잘 만든 드라마인 건 맞더라고.
제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 유럽 전선에 뛰어든 미군 공수부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체 전쟁의 전황이나 전개 등을 묘사하는 데에는 큰 시간을 투자하고 있지 않다. 하늘 높이 찍은 로우 앵글과 근엄한 톤의 장군 목소리 따위로 전황을 훑는 드라마가 아니라, 땅 바로 위에 발 붙이고 서서 적들의 총탄과 폭격을 그대로 맞으며 버틸 수 밖에 없었던 이병과 일병과 상병과 병장과 하사와 중사와 상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의 위대한 결정보다 버팀으로써 승리한 병사 한 명 한 명의 드라마. 근데 이걸 또 총 10부작짜리 드라마에서 각 에피소드 마다 화자를 달리하며 다시 한 번 더 강조 해준다. 예컨대 어느 한 에피소드에서는 아래 병사들을 이끄는 하사관의 관점에서 그의 부담감을, 전쟁의 실상을 목도하고 PTSD를 앓게된 한 이등병의 관점에서 그의 두려움을, 또 방아쇠를 당기기 보다 붕대와 모르핀을 찾기 위해 전쟁터를 샅샅이 뒤지는 의무병의 관점에서 그의 처절한 지난함을 묘사한다. 한 공수부대 안에서도 각 계급과 임무,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는 서로 다른 인물들을 통해 전쟁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는 편.
다만 이 점과 맞물려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큰데, 각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전우애'라는 뜻의 제목까지 내건 드라마 치고는 개별 인물들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 물론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시청자로서 같은 동양인 캐릭터들에 비해 생김새가 좀 다른 서양인 캐릭터들을 한 번에 직관적으로 구분해내기 어려울 수도 있지. 미국인들의 이름이 너무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상 흑먼지가 새까맣게 묻은, 그리고 하나같이 똑같아 보이는 군복을 통해 더 헷갈릴 수도 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봐도 내가 평소에 이런 거 잘 구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지. 그리고 또 분명히 기억되는 캐릭터들도 존재한다고. 가니어나 웹스터, 립튼 같은 인물들은 분명하게 기억되고 또 구분된다. 내가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니까. 고로 도출되는 결론. 몇몇 캐릭터들 빼고는 대부분이 저마다의 캐릭터성과 얼굴이 강조될 기회가 적었다는 것. 가니어 같은 경우엔 2화에서 저돌적인 면모와 더불어 상관인 윈터스를 은근 무시하는 성향으로 분명 강조가 되지 않나. 웹스터는 아예 7화의 핵심 내레이터이며, 립튼 역시도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렇게 성격 등을 시청자들에게 천천히 인식 시켜줄 만한 타이밍이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조금 더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모든 게 갈무리 되는 마지막 10화까지 보고나면 그제서야 어느정도 다 구분이 가능해지지. 근데 그건 좀 늦은 감이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인물들을 묶어주는 윈터스 소령 덕분에 드라마에 찰기가 붙는다. 상관인 소블에 의해 무시 받다가 끝내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주더니 유럽 땅으로 넘어온 뒤부터는 탁월한 지도력과 침착함, 그리고 동료와 부하들을 알뜰살뜰이 챙기는 인간적인 면모로 시청자들이 호감을 내어줄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 에피소드 별로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시점을 차용하는데 결국 그 모든 순간을 윈터스가 묶어주어 이야기 전개 전체가 정리정돈 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최근 봤던 <아웃포스트>와 더불어 '병사의 주적은 간부'라는 불편한 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이기도 한데, 그나마 윈터스 소령 같은 인물이 있어 조금이라도 안심되고 다행이라는 생각 역시 든다.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작전의 형식에 따라 에피소드 마다 다른 컨셉의 전투를 보여주고도 있는데 1화의 훈련소 상황부터 시작해 공수작전, 야간 침투 작전, 포로 생포 작전, 참호전 등등을 보여주다가 끝내 홀로코스트와 종전 직후의 기묘하고 긴장감 있는 나른함으로 종결되는 전체적인 아웃라인 역시 맘에 듦. 물론 드라마 특성상 그중 흥미로운 부분도 있고 덜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지만... 좀 산만 하다고 느껴지는 에피소드도 분명 있었다. 종전 직후 그 특유의 예민한 평화로움이 강조된 마지막 10화가 재미있긴 했지만 너무 여러 사건들이 갑자기 일어났다 갑자기 해결되는 인상이라 좀 그렇게 느꼈던 듯.
방영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찍 봤더라면, 아마 재밌는 드라마 쯤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나도 어른이 되었고, 뒤늦은 군입대까지 했다가 제대한지도 이제 어느새 7년이 다 되어간다. 군복을 입고 수도없이 앞에 총을 외쳐봤던 한 사람으로서, 바로 그 입장으로서 이 드라마를 보아 좀 더 다층적으로 즐길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 같은 것들이, 군복을 입으면 내 옆에 단단히 서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절로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쓰러진채 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전우를 위해 빗발치는 총탄세례를 뚫고 참호 밖으로 과연 나갈 수 있을까. 군대에 다녀오면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좀 더 쉽게 얻는다. 그게 용감한 것인지, 아니면 멍청한 짓인지는 구분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정말로 그렇게 된다.
연이어서 곧바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근시일 내에 <더 퍼시픽>까지도 챙겨 보아야겠다. 근데 왓챠는 자막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가끔 자막 튀는 건 넷플릭스도 마찬가지지만, 왓챠는 등장 타이밍이나 오역 등이 좀 더 빈번하게 느껴진다. 아니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HBO 맥스 들어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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