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남부, 친퀘테레 풍경이 절로 떠오르는 픽사의 신작. 사실 픽사의 백전불패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한지도 이제 꽤 되었지. <토이 스토리>에서부터 <인크레더블>까지의 10년, 그리고 또 <라따뚜이>부터 <토이 스토리 3>까지 이어졌던 3년 동안의 픽사는 그야말로 원 히트 원더 아닌 올 히트 원더의 표본이였다. 가히 신계의 무공이었지. 그러나 <카> 트릴로지와 <굿 다이노>, <온워드 - 단 하루의 기적> 등의 평작들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부터, 픽사는 인간계로 조금씩 떨어지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루카> 역시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분명 걸작은 아니거든. 주제가 너무 뻔한데다 또 많아서 교통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 좀 있어. 그런데도 <루카>에는 청량하고 상큼한 계절감의 마법이 존재한다. <업>이나 <니모를 찾아서>처럼 진중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한 스튜디오의 전체 필모그래피로 보았을 때 이 정도로 힘을 뺀채 가벼운 텐션을 유지하는 영화들도 한 두 개씩은 필요한 거겠지.
그러니까, 픽사의 소품 정도 되는 영화다. 현실 세계에 깃들어있는 무겁고 진지한 주제로 그를 뒤바꿔보려는 혁명적 태도를 지닌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기술적 야심으로 관객들에게 이른바 신세계를 전달하려고 하는 영화 역시 아닌 것. 영화는 그저 남부 이탈리아의 시원한 여름 풍경을, 푸르다 못해 새파랗게 느껴지는 그 계절감 만을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그리고 결과가 제작진들의 그 노력에 화답하는 편이고.
애니메이션 치고도 주제가 뻔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단점이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의 갈등,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가족애와 우정, 꿈과 소망 등등. 하나같이 다 전형적이고 그걸 다뤄내는 방식 역시도 상투적이다. 그나마 그 중 하나라도 제대로 골라잡아 심도 깊게 묘사 했다면 좀 나았을런지도 모르겠다. 허나 지금의 <루카>는 여러 개의 주제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대 다소 산만한 인상을 주고, 결과적으로는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관객으로서 헷갈리게 만든다. 모든 애니메이션들이 다 그렇지 않냐고? 아냐, 디즈니의 최근 애니메이션인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만 봐도 그런 오해는 쉽게 풀린다. 그 영화 역시 거시적인 주제는 뻔했지. 그러나 미시적으로 한 발 더 깊게 들어가면, 그 영화엔 그 영화 만의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메시지가 존재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 <루카>는 "친구 먹으면 다 된다" 정도로 뭉뚱 그리고 있는 반면,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본전 생각 말고 너가 먼저 다가가라"라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 하거든. 고로 모든 애니메이션들이 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는 질문은 잠시 넣어둬도 좋단 말이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이런 단점들에도 <루카>는 푸른 생명력을 띈다. 멕시코 사람들의 저승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던 <코코>에 이어, <루카>는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의 풍부하고 생명력 있는 이승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지금의 코로나 19 시국에 간접 여행이라는 대리 만족을 시켜주는 느낌. 아이들의 눈빛과 몸짓은 활기차고, 노랗고 빨갛고 또 파랗게 그려진 마을의 풍경은 정겹다. 푸르른 바다와 기분 좋게 퍼석대는 모래사장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아 기쁘다. 여기에 이탈리아 특유의 문화가 가미된 지역색 역시 풍부하게 느껴진다. 파스타와 젤라또 아이스크림 역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속의 소품 임에도 불구하고 식욕을 자극한다. 그야말로 오감으로 만든 영화라 할 만하다.
이탈리아라는 특유의 공간적 배경을 색다르게 끌고 왔다 느껴진 부분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영화의 리듬.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봐도, <루카>의 호흡은 명백하게 가쁘고 빠르다. 부모와의 갈등을 빚던 주인공 소년이 결국 가출을 해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한다? 다른 영화들이었으면 시작하고 나서 20분 정도 뒤에나 가능한 전개지. 그러나 <루카>는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그냥 주인공 루카를 바깥 세상으로 뻥 차버린다. 국가적, 인종적 편견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대개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말도 빠르고 몸짓을 쓰는 데에도 능하다 여기지 않나. <루카>의 빠른 전개와 그 리듬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그러한 생활 양식을 그대로 체화 해낸 듯 하다. 전개도 빠르고, 극중 인물들의 말도 다 빠르고, 대사와 대사 사이 텀도 다른 영화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짧고. 그냥 영화 자체가 이탈리아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만 같다.
그렇게 전반적으로 귀엽고 재미있고 시원한 영화. 근데, 장르 취향 때문인지 뭔지 난 루카의 큰아버지 우고가 사는 심해 묘사가 좀 더 나올 줄 알았는데 쿠키 영상에서만 잠깐 언급되고 끝이더라고? 하긴... 가족 관객 유치해야 하는 영화에서 어둡고 무서운 심해 묘사 너무 많이 했으면 그거야말로 코즈믹 호러였겠지.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