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프닝의 뮤지컬 씬이 압도적이었다. 흥겨운 보컬의 리듬과 적잖이 뮤지컬스러운 군무, 인물들의 서사를 꾹꾹 눌러담아 정확한 딕션으로 전달하는 힙합 비트 위의 래핑.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본 극장에서의 압도감. 그 꽉 조인 분위기는 중반부까지 성실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웬걸? 원래라면 진작 끝났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점점 질질. 지금쯤 영화 끝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순간에 구태여 한 곡 두 곡 뮤지컬 넘버를 하나씩 더 보탠다. 과유불급이란 게 이런 것일까? 흥이 많은 게 흠이라면 흠이 되는 진풍경.
전체 뮤지컬 넘버 구성으로 보았을 때, 관객들 귓구멍을 쑤시고 할퀴는 이른바 킬링 넘버가 없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겨울왕국> 하면 'Let it go'가 자동 연산 되는데, <인 더 하이츠> 하면 그렇게 바로 딱 떠오르는 곡이 없다. 곡들이 전체적으로 다 좋고 완성도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육상 유망주들만 모아둔 느낌? 그중 한두 명은 우사인 볼트가 되서 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 그래야 경기 자체에 대한 관심이나 인지도도 올라가도, 그러다보면 또 다른 선수들도 주목 받는 건데. <인 더 하이츠>에는 그렇게 우사인 볼트 역할을 해줄만한 킬링 넘버가 부재한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곡들이 다 좋은 건 인정. 앞서 말했던 오프닝의 뮤지컬 넘버도 좋고, 수영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또 당첨 타령 뮤지컬 넘버도 훌륭하다. 시원한 여름 풍경이 주는 상쾌함과 더불어 흥겨우면서도 적절히 부드럽게 제동을 거는 곡의 템포도 아슬아슬 뛰어나고, 무엇보다 화면 연출이 정말 내 스타일이었다. 키치함을 가득 안고 화면 곳곳에 낙서를 그려대는 스타일. 그 뮤지컬 넘버 시퀀스를 가히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그 이후 농구장에서 이어지는 니나와 베니의 달달한 뮤지컬 넘버까지도 훌륭한 편. 거기까지 보는동안 향후 블루레이 구매는 물론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사운드바 뭘 사야 좋을까 고민까지 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딱 그 직후부터 시작된다. 일단 영화의 런닝타임이 너무 길다는 것. 거의 2시간 30여분에 달하는 런닝타임인데, 관객으로서 지치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부분이 딱 저기까지다. 농구장 장면 말이다. 그 장면 이후 영화가 초반부터 암시했던 정전이 워싱턴 하이츠 전체를 어둡게 만드는데, 원작 뮤지컬이 어찌되었든 난 거기가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결말부가 되었어야 했다고 본다. 정전까지 이르는 데에도 이미 오래 걸리는데,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할머니의 과거 회상 뮤지컬 넘버 시퀀스. 시퀀스 자체는 아름답고, 원작 뮤지컬에서도 분명 훌륭했을 테지만, 영화 매체로써는 여기서부터 흐름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막말로 이민 1세대로서 그 할머니가 겪었을 과거 고생스러웠던 이야기들...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거든. 뻔하잖아. 오히려 그건 대사 몇 줄만으로 표현 되었을 때 더 촌철살인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길고 긴 뮤지컬 넘버로 뽑아내니...
바로 그 지점부터 영화는 내내 지루해진다. 여기에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다는 것 역시 문제가 되고. 등장인물들 중 대부분이 모두 꿈과 사랑에 대한 열정을 노래하는 영화인데, 그 꿈들을 위해 각자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달려나가겠다-라는 구체성이 없다. 그냥 꿈꾼답시고 춤 추고만 있음. 우스나비와 바네사 각각이 가진 꿈과 그들 사이의 사랑, 여기에 우스나비와 그 사촌 동생 사이 관계, 니나와 아버지의 갈등, 니나와 베니의 사랑 이야기, 동네 전체를 아울렀던 할머니의 이야기, 워싱턴 하이츠 대표 미용실 사장님의 이야기 등등. 각 캐릭터들의 매력과 개성이 확실하단 점은 장점이지만, 인물들의 구성이 너무 복잡하고 산만하다는 것은 명백한 단점. 솔직히 우스나비 위주로 집중해서 가는 게 더 좋았을 거라고 본다. 니나는 아예 빼버리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몇 장면을 빼서라도 런닝타임을 줄여라,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니 좀 줄여라 등등의 불만들. 원작 뮤지컬의 존재와 그 팬들을 고려하면 가당치 않은 불만들일 것이다. 까놓고 말해 "원작이 그런 걸 어쩌라고"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할 말 없는 것. 그러나 이것은 영화다.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매체인 것이다. 무대 예술은 넘치는 생동감으로 객석의 관객들을 휘어잡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길면 길수록 관객들의 집중력은 분산된다. 물론 영화의 런닝타임이 길면 안 된단 소리는 또 아님. 런닝타임을 세 시간 가까이 뽑을 거면 겁나 재밌게 만들면 된다고. 제임스 카메론이나 왕년의 피터 잭슨처럼 말이다.
대개 다 좋은 곡들을 가졌으니 계속 부릉부릉 대기는 하는데, 정작 킬링 넘버는 없어 확 질주하지는 못하는 느낌. 근데 거기다 길기는 겁나게 길어. 그래서 부릉부릉 털털털털 하며 나머지 한 시간 반을 버텨야하는 영화. 아... 중반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사운드바는 커녕 블루레이도 안 살 것 같다.
뱀발 - 니나의 아버지로 나오는 운수회사 사장님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베일 오가나 연기했던 배우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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