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샤 로마노프를 주인공으로 한 블랙 위도우 솔로 영화가 만들어진다 말했을 때, 그리고 그 극중 시기가 <시빌 워> 직후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들었을 때 우리가 기대한 것은 <본> 시리즈 느낌의 에스피오나지 액션 스릴러였을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번개를 쏘고, 두 손을 휘저어 순간이동을 하는 초특급 능력자들 사이에서 일반인에 가까운 블랙 위도우가 내세울 건 강력한 체술 액션과 에스피오나지 특유의 협잡 능력이니까. 게다가 <시빌 워> 직후라면 소코비아 협의문에 의해 나타샤가 한창 쫓기고 있을 때 아닌가. 소련 출신 스파이가 미 정부기관에 쫓기며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이야기라니. 이거 듣고 <본> 시리즈가 안 떠오르면 그건 그거대로 또 이상한 거지.
스포 위도우!
인상 비평부터 하자면, 일보 전진하고 또 일보 후퇴한 느낌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같은 MCU 영화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블랙팬서>였는데, 다행히도 그것보단 나았음. 물론 <블랙팬서>도 나쁜 영화는 아니었지만, 장르적 재미와 쾌감보다 메시지를 더 앞세우고 돌진했던 영화란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있었거든. 그랬던 <블랙팬서>와 마찬가지로, <블랙 위도우> 역시 특유의 진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맹렬하게 설파하는 영화다. 그러다보니 액션 블록버스터, 그리고 수퍼히어로 장르로써는 살짝 부족하게 느껴짐.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블랙팬서>보단 기억에 남는 액션 시퀀스가 더 많았다는 점.
배신과 협잡으로 점철된 에스피오나지 세계 묘사는 그리 크지 않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우는 건 의외의 가족 드라마고, 그 또한 나타샤의 과거와 그로부터 연유된 그녀의 현재 모습을 다시금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로써 기능한다. 지금까지의 MCU 속 묘사를 토대로 한다면, 그녀의 주된 포인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가족에 대한 염원.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엔드 게임>에서 보여지듯이. 게다가 그녀는 첩보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타인을 쉽게 믿지 않는 성격이었지. 그러나 그 빗장이 한 번 제대로 열리기만 한다면 그녀가 상대에게 무한의 신용을 보내기도 한다는 것을 역시 우리는 보아왔다. 그녀가 클린트 바튼을 대하는 태도도 그랬고, 무엇보다 <엔드 게임>에서 또 자기가 이야기하잖아. 어벤져스 자체가 자신의 또다른 가족처럼 느껴졌다고. 그리고 두번째, 그녀는 과거 자신의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왔다는 것. 그리고 그를 후회한다는 것. 이는 <어벤져스> 로키 심문 장면에서 드러난다. 로키한테는 세뇌당한 클린트가 다 이야기해준 거고. 하여튼 이 두가지 측면이 합쳐지면서, <엔드 게임> 속 그녀의 희생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무고한 어린애까지 죽였을 정도로 자신의 과거에 후회가 많았고, 여기에 가족처럼 여겼던 사람들마저 절반이 죽으면서 완전히 희망을 잃었던 여자. 그랬기에 가족과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기 하나쯤은 절벽 아래로 내던질 수 있었겠지.
<블랙 위도우>는 솔로 영화로써 그런 나타샤의 과거를 모두 제대로 채워준다. 어벤져스에게 느꼈던 가족애가 어디로부터 연유 했고 또 그 배신감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블랙 위도우>는 잘 보여주고, 또한 피 묻은 과거 역시 확실하게 묘사해준다. 물론 아쉬움이 없진 않다. 이런 과거 이야기들은 때때로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촌철살인처럼 느껴지거든. 근데 이 영화는 그걸 일일이 보여줘버리니까. 태스크 마스터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단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을 차치한다면, 지금까지 MCU의 전체 이야기내에서 나타샤의 행보들을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측면에 있어 솔로 영화로써 제기능을 하는 편.
그리고 당연하게도, 영화는 페미니즘적 노선을 취한다. 이는 타당해보인다. 주인공이 여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페미니즘을 설파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다른 여성 캐릭터라면 몰라도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를 다루면서 현대적 관점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것은 일종의 낭비일 것이다. 친부모 없이 인간병기로 길러졌다는 설정은 곧 선택권을 박탈당한채 특정 관념 안에서만 이용된 인물 묘사로 이어지고, 더불어 여성 캐릭터들을 은연중에 조종해 자기 멋대로 부린다는 남성 악당은 곧 현대적 의미의 가스라이팅 관련 묘사로 이어지기가 너무나도 쉽고 당연하다. 그 외에도 유리 천장, 여적여, 가부장적 관계 등등 페미니즘 관련해서 표현 해낼 수 있는 범위가 어마어마하지. 고로 <블랙 위도우>를 통해 페미니즘을 설파한다는 것은 합리적이다.
다만 이를 잘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좋다 이거야. 페미니즘 다루는 거 좋아. 가스라이팅 등을 통해 이용 당하며 자신만의 온전한 선택권을 갖지 못했던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 너무 좋다 이거지. 다만 <블랙팬서>와 마찬가지로, 장르적 재미와 쾌감을 줄여버린채 그 메시지만 앙상하게 남은 느낌이라 너무 노골적이란 인상이 남아버린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페미니즘 메시지 자체는 좋은데 그걸 땅속의 보물 마냥 액션과 스펙터클 사이에 슬며시 묻어두었어야 했는데 거기서 실패해버리니까 좀 아쉽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건 메시지의 함량 문제라기보다는 액션과 스펙터클의 분량 문제에 더 가까워서.
어쨌거나 레이 윈스턴이 연기한 드레이코프 장군의 캐릭터와 나타샤 사이의 관계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뭔놈의 <007> 악당 마냥 자기 계획 다 입으로 털어놓고 역관광 당하는 꼴이 웃기긴 함. 영화도 스스로 그걸 알아 멋쩍었는지 앞부분에 <007 - 문레이커>를 대놓고 깔아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클리셰로만 남았음. 그러나 드레이코프가 페로몬을 이용해 나타샤를 때리려할 때, 그녀가 확 움츠러들어버리는 연기는 참 좋았다. 현대의 여성 관객들이 많이 공감할 만한 구석 같기도 했고. 아, 레이 윈스턴 이미지 보면서 뭔가 하비 와인스타인 떠올렸는데 그거 나만 그런 거임?
이제 액션과 스펙터클 이야기. 이거 관련해서 악당 이야기를 안 하기란 불가능하겠지. 수퍼히어로 장르의 정체성은 곧 악당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태스크 마스터의 설정은 굉장히 좋다. 거울처럼 상대의 동작과 공격을 따라하는 수퍼빌런이라니. 미러링이란 점을 활용해 페미니즘이란 주제와 잘 얽혀들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수트 리뉴얼도 굉장히 잘했음. 원작에서는 그냥 후드 쓴 해골바가지인데 여기서는 간지나는 헬멧으로 잘 리뉴얼 했더라. 그러나 외적묘사만 좋으면 무얼 하나. 미러링 액션이란 설정은 설정집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였나 보다. 그 설정으로 뭔가 참신한 액션을 보여주질 못한다. 초반부에 독일 공항에서 싸우던 호크아이와 블랙팬서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고 그 둘과 비슷한 체술들을 많이 흉내 내던데, 딱 거기까지 뿐. 다른 건 몰라도 나타샤와 대립할 때마다 그녀 액션 카피 주구장창 했어야지. 그래서 나타샤가 계속 자신에게 자신이 당하는 듯한 이미지로 유지 했어야지. 근데 지금은 태스크 마스터의 정체와 그에 스며든 주제 의식 만을 위해 악당의 액션이 희생된 듯한 뉘앙스다.
어차피 개그 캐릭터였단 점에서 아쉬움이 아주 많이 남진 않지만, 그럼에도 레드 가디언의 캐릭터 역시 아쉽다. 개그는 좋아, 근데 앞에 포석 깔아둔 것들에 비해서는 액션이 너무 별 것 없잖아. 하다못해 태스크 마스터와 싸우는 장면은 다른 인물들 교차편집 때문에 제대로 보여지지도 않음. 그나저나 MCU내의 소련은 수퍼솔져 혈청 연구 많이 했네... 윈터 솔져를 필두로 <시빌 워>의 그 강화 인간들도 있었는데 여기에 추가해 레드 가디언까지 존재 했다니. 미국 vs 독일 구도에서 미국 vs 소련 구도로 넘어갔던 역사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기도. 그 누구보다 강화 인민에 진심이었던 나라 소련... 어떻게보면 하이드라 보다도 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독일은 각각 한 명씩의 수퍼 솔져만을 갖고 있었는데 소련은 대충 세봐도 거의 10명에 가깝잖아? 이 새끼들은 대체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거야, 대체...
레드룸 설정 역시 좀 아까움. 하이드라 외에 암흑세계에서 암약하고 있던 조직이 하나 더 있었는데 나타샤를 비롯한 어벤져스 멤버들이 몰랐다? 근데 이 정도는 그냥 퉁치고 넘어가 줄 수 있는데... 대체 레드룸은 어떤 기관이길래 공중부양 기지 시설도 갖고 있었던 거냐? 헬리캐리어야 쉴드가 전세계적 기관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레드룸은 현재의 러시아 정부도 잘 몰랐던 것 같은데? 드레이코프가 어마어마한 거부란 설정이 붙는다해도 일개 개인이 이렇게 세계 지배의 전초 기지를 하늘에 띄워둘 수 있는 건가? 이건 진짜 지극히 <007>스러운 설정이라 또 놀랐음.
그래도 자꾸 마음에 남는 액션들이 존재하기는 한단 점에서 <블랙팬서> 보단 나음. 굉장히 짧은 장면이지만 결말부의 스카이다이빙 씬에서 나타샤에게 슬금슬금 활강해 다가오는 태스크 마스터의 이미지가 좋았고, 전반부와 중반부에 놓인 현실 베이스의 액션 시퀀스들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더 드는 아쉬움. 액션이 좀만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지금은 중간에 좀 지루하고 늘어지는데 그 부분을 보강 했으면 어땠을까... 체술 액션을 좀 더 살리고, 주제 의식에 조금 반하더라도 레드룸의 다른 위도우들과 더 피터지게 싸우면 어땠을까...
스칼렛 요한슨은 언제나 좋고, 오랜만에 본 레이첼 바이스도 반가웠다. 마침 최근 <미이라> 시리즈를 다시 정주행 했던 터라 더 반가웠음. 데이비드 하버는 <헬보이>의 악몽을 가까스로 지워나가는 것 같아 다행이었고... 여기에 레이 윈스턴도 멋지더라. 그러나 다 떠나서, 플로렌스 퓨가 너무 매력적으로 나와 오히려 당황. 그동안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여기서는 뭔가 매력 1 스탯이 더 추가된 듯한 느낌이었다. <파이팅 위드 마이 패밀리>에서 더 액션을 추가하니 훨씬 더 매력 상승한 느낌. 정극 연기도 좋지만 확실히 플로렌스 퓨는 액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올가 쿠릴렌코 나오더라. 나오는지 1도 모르고 있다가 오프닝 크레딧에 이름뜨길래 뭔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악당의 정체였음. 그나저나 등장내내 가면 쓰고 나오는 역할인데 과연 그녀가 연기한 건 어느정도였을까? 유일하게 얼굴 나오는 두 장면만 연기 했을까? 나머지는 그냥 당연히 스턴트맨에게 바통 넘기고?
아직 MCU 드라마 쪽을 살피지 못해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쿠키는 좀 짜증나더라. 사실 굉장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인데, 본편 빼고 쿠키 영상 혼자서만 <엔드 게임> 이후 시점이걸랑. 그것만 아니면 다시 정주행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MCU 소개 시켜줄 때 <시빌 워> 직후에 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엔드 게임>에서 그녀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본다면 더 감정적으로 다가올 부분들이 본편에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황상 <시빌 워> 직후에 관람하고 이후 <엔드 게임>까지 이어지는 감상 타임라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음.
어쨌거나 저쨌거나. 2년 만에 극장에서 관람하는 MCU 영화였다는 점에서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캐릭터에게 새로운 미답지를 부여 해낸 마블 스튜디오의 능력에 또 신나고. 막말로 이 영화 덕분에 기존 나타샤 로마노프의 캐릭터가 감정적으로 더 풍부 해졌다고 생각함. 여전히 좀만 더 일찍 나왔으면 좋았겠다 싶긴 하지만.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도 많고 큰 재미보다 잔재미를 선택한 지점이 많아 아깝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쁘다. 이렇게, 마블의 네번째 페이즈가 드디어 열렸다.
덧글
잠본이 2021/07/20 10:32 # 답글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본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십수년이 흘렀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