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7 15:57

스페이스 잼, 1996 대여점 (구작)


내 어린 시절, 요즘 꼬꼬마들은 모를 따조라는 것이 있었다. 어린 내 두 손에 꽉 찼던 과자 한 봉지 사면 조그맣게 하나씩 들어있던 따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걸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진 않았거든? 근데 뭐, 대부분의 수집품들이 다 그러하듯 어떤 특정한 용도가 있어서 모으는 게 아니잖아. 그냥 모으고 싶어서 모으는 거지. 포켓몬 빵의 스티커가 그러했듯이... 시몬, 너는 아느냐. 새 포켓몬 스티커 붙일 자리를 만들기 위해 플라스틱 필통의 뚜껑을 요리 살피고 조리 살피는 기분을. 어쨌거나 <스페이스 잼>이 내게는 딱 그런 영화다. 영화적 재미의 함량이 높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해서 내가 마이클 조던의 팬이었다거나 농구를 좋아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거든? 근데 그땐 그냥 한없이 재미있기만 했었어. 때문에 재관람 하기가 두려운 영화이기도 했다. 100%의 확률로 추억보정 깨질 텐데, 그게 싫었거든.

결론부터. 추억보정이 좀 깨지기는 했다. 근데 일부러 기대치를 많이 내려놓고 봐서인가? 아니면 그냥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서 인가? 그냥 저냥 재미있게 봤다. 아니, 영화가 재미없는 건 맞는데... 그냥 마이클 조던과 벅스 버니 패거리들이 어울리는 것 자체가 너무 반갑고 좋았던 것 같음.

실상은 엄청 짧은 영화였다는 게 어른 되고나서야 확실하게 체감된다. 어린 시절엔 나름대로 서사가 튼튼한 영화였던 걸로 기억했는데, 다시 보니 길지 않은 런닝타임 내에 이런 저런 설정들 욱여 넣느라 김밥 옆구리 터지듯 구멍 뻥뻥 뚫려있는 영화였음. 외계 깡패 무리가 툰 월드를 침략했고, 그들과의 농구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벅스 버니 패거리들이 현실 세계의 마이클 조던을 끌어들인단 전개는 싫지 않다. 근데 마이클 조던이 그 농구 경기를 수락하기 까지의 과정이 너무 대충인 건 사실임. 이 사람은 방금까지 현실 세계 속에서 살다 토끼와 오리가 말을 하는 만화 세계로 넘어왔는데 거기에 별 이질감이 없나보다. 놀라거나 당황해하거나 이런 게 없고 그냥 벅스 버니 보는 순간 인정. 자신이 왜 이 농구 경기에 참가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별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냥 트위티가 쳐맞는 모습 보고 동정심에 도전 수락. 하다못해 얘네 사연듣고 감화되는 순간이라도 좀 더 만들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더불어 당시 합성 기술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들이 줄지어 선다. 2D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섞겠다는 아이디어는 좋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이미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가 존재하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주류는 아니었으니까. 너무 귀엽고 좋은 아이디어이지 않나? 하지만 세상만사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아이디어만 좋으면 안 된다. 디자이너들이 멋들어지게 디자인 해봤자 엔지니어들이 구현 해낼 수 없는 아이디어라면 아무 소용 없다니까. 일단 2D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합성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허나 한계는 명확한 상황이었지. 2D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실제 배우가 대화를 하는 정도는 괜찮지. 좀 더 양보해서, 야구 정도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조던을 기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스페이스 잼>은 농구하는 영화다. 그리고 농구는 야구나 테니스 등의 종목에 비해서는 훨씬 더 육체적 스킨십이 많고 또 강한 종목이잖아. 한마디로 상대와 몸을 더 많이 비비고 부딪힐 수 밖에 없단 이야기인데, 당시의 합성 기술로는 이게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1996년 당시 합성 기술의 한계가 확실하다 보니, 경기중의 몸싸움 등을 구현해내기는 했는데 그게 썩 어색함. 그러다보니 또 농구 경기 자체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지고. 막말로 90여분의 상영 시간 동안 농구 하는 장면은 별로 되지도 않는데, 정작 그 경기 장면들도 농구를 보고 있단 생각이 잘 안 든다. 스포츠 경기를 볼 때의 긴장감이나 신속함이 전혀 안 느껴지는, 스포츠 영화이면서 스포츠 영화가 아니기도 한 괴랄한 스포츠 영화가 되어버림.

그럼에도 여전히 반가웠던 건 벅스 버니와 그 패거리들, 그리고 마이클 조던의 얼굴이었다. 그게 진짜 의문이었음. 왜냐면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마이클 조던은 물론이고 농구라는 종목 자체에 1도 관심이 없었걸랑.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NBA는 내게 패션 브랜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 그런데도 왜 나는 그 당시 마이클 조던의 얼굴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몇 십년만에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고 있는 동안에도 깨닫지 못했던 점이었는데, 이 글을 쓰던 중 어렴풋하게 나마 그 이유를 알게된 것 같다. 벅스 버니랑 그 친구들은 나와 내 친구들이었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벅스 버니에게 투영했던 것 같아. 근데 마이클 조던이 그 벅스 버니를 어떻게 대하는가? 2D 애니메이션 세계에 떨어져 당황스러울 만도 한데, 그는 그냥 그 세계와 그 존재들을 쿨하게 인정해버리고 까짓거 못할 게 뭐 있겠냐는 태도로 그들과 함께 농구 경기를 벌인다. 다 큰, 그것도 엄청나게 큰 어른이 어린 아이들의 세계를 인정해주고 끝내는 그 안에서 함께 뒹굴어주기까지 하다니. 어린 시절의 내게는 그래서 마이클 조던이 멋있었던 것 같다. 어렸던 우리들과, 아무 조건 달지 않고 수준 맞춰 한껏 놀아주던 어른이라서 그가 잠깐 동안이나마 내 영웅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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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스페이스 잼 - 새로운 시대 2021-07-17 16:25:42 #

    ... 나름의 맛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영화적 재미는 확연히 떨어졌던 전작. 그것도 벌써 25년여전 이야기니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하여튼, 전작의 흥행 성공과 또 비평적 실패를 모두 반면교사 삼아 돌아온 속편이자 리부트. 당대의 ... more

덧글

  • 싸바 2021/07/17 19:21 # 삭제 답글

    따조라니 저도 엄청 모으던 기억이... 어릴 때 딱히 인상적으로 본 영화가 아니라 잊고 있었는데 리뷰를 읽으니까 먹먹해지네요. 신작은 워너 카메오 보고 싶어서 나중에라도 챙겨 볼까 하는데 예상대로 평이 썩 좋지는 않더군요. 아무튼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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