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쿠자로서 격정의 시대를 살았던 한 남자의 일대기. 미국에 갱스터, 이탈리아에 마피아, 한국에 조폭이 있다면 아무래도 일본엔 야쿠자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야쿠자 영화나 다른 나라의 범죄 영화들관 결이 좀 다름. 홍콩 느와르처럼 사나이들 간의 의리나 낭만에 기댄 감성파 작품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야쿠자와 가족>이 추구하는 방향은 마틴 스콜세지의 그것에 더 가까웠다. 물론 마틴 스콜레지의 현실성과도 살짝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야쿠자와 스포일러!
한 때의 홍콩 느와르와 한 때의 한국 조폭 코미디들에서 그랬듯, 조직 범죄자들은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종종 낭만화 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범죄자일지언정 항상 의리와 신의를 지켰고, 두목과 부하를 가족처럼 대하고 지켰으며, 심지어는 <두사부일체> 시리즈에서 처럼 영웅화 되기도 했다. 사실 이 계열 끝판왕인 <대부>만 해도 마피아 패밀리를 장르적으로 멋지게 그려내고 있잖아. 물론 막무가내 태도로 그들을 멋지게만 그렸던 영화는 또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멋지게 보이는 부분이 아예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인 거다. 하여튼, 그런 종류의 뒷골목 배경 영화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올 때 마틴 스콜세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택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방향. 범죄자들 사이에 의리나 명예가 어디있어? 짐짓 있어 보이게 척할 뿐이지 결국은 다 인간말종들일 뿐이라는 사실. 마틴 스콜세지가 그려낸 범죄자들은 욕망에 흥하다 결국엔 망하고야 마는, 지독히도 어리석고 한심한 작자들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야쿠자와 가족>은 마틴 스콜세지의 방식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야쿠자와 가족>은 미국 배경의 마틴 스콜세지 영화들과는 다른, 일본이란 공간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마틴 스콜세지가 본 미국은 범죄자들과 무뢰배들이 건국한 나라였다. 누군가 흘린 피 위에 세워진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고, 범죄자들은 그런 현재의 미국을 뒷골목에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야쿠자는 미국의 갱스터들과 경우가 달랐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모든 야쿠자들에게 일종의 사회적인 낙인을 찍어버렸다. 야쿠자로 활동했던 기간이 조금만 되어도 그들은 정부 관련 서비스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복지 서비스는 커녕 은행 계좌 만드는 일조차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런 전직 야쿠자들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또 흘겨보기 시작했다. 현대의 일본에서 야쿠자란 그저 상종못할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게 된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범죄물 속 주인공들은 모두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한 개인의 몰락이었지. 조직은 유지되고, 체제는 변함없지만 그 안의 인물 구성만 바뀌었을 뿐. 결국은 너가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네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비극. 이에 비교해 <야쿠자와 가족>은 체제 자체의 몰락을 그려낸다. 한 개인의 흥망을 떠나, 그냥 시대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 어디에도 발 붙일 곳 없어진 것이다. 개인의 몰락이 아닌 한 시대의 몰락. <야쿠자와 가족>이 그려낸 2019년의 풍경은 그래서 더욱 더 지독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결과적으로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라스트 사무라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끝내 손으로 붙잡지 못한 과거의 영광과 영화에 바스러져가는 시대와 그 안의 사람들. <라스트 사무라이>의 사무라이들과 <야쿠자와 가족> 속 야쿠자들은 짐짓 비슷한 존재들처럼 느껴진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일부러 유리 시키며 얻었던 자유. 그러나 사소한 사건과 그에 대한 책임으로 야쿠자가 되어버린 겐지. 떡 주무르듯 세상을 주무를 수 있었고, 원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또한 아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던 화려한 시간. 아니, 화려했던 시간. 그놈의 의리가 뭐라고, 부두목 대신 14년 간의 감옥 생활을 버티고 출소한 겐지 앞에 나타난 건 너무나 변해버린 세상이었다. 현직 야쿠자는 규제 당하고, 전직 야쿠자는 멸시 받는 세상. 충성스럽던 부하는 나를 멀리하고, 사랑했던 여자는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제발 떠나달라고 극존칭을 써가며 부탁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겐지. 그런 겐지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은 친동생처럼 여겼던 쓰바사가 자신처럼 되는 것을 막는 일 뿐이었다.
비로소 죽으며 얻어낸 쓸쓸한 자유. <선셋대로>처럼,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처연함이 있는 영화. 감독의 전작인 <신문기자>를 아직 보지 못했는데, 그 영화 역시 평가가 좋더라.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이 죽은 이후 줄곧 내리막길만을 걸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걸출한 영화인 하나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현재의 일본 영화계.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삼은 리메이크 실사 영화들이 쉴새없이 범람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후지이 미치히토가 일본 영화계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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