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의 맨하탄이 폭격 아닌 폭격 당한다. 허무하리 만큼 속절없이 무너지고 또 사라진 두 개의 빌딩. 그러나 언제나 그랬고 또 그리해야 하듯이, 빌딩보다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지 않은가. 테러리즘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을 기리고 또 그들의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위로금을 준비하기로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가족의 죽음을 맞이한 그 수많은 유족들에게 지불할 수 있는, 또 지불해야하는 그 금액은 과연 어느 정도가 적정한가? 모든 유족들에게 같은 가격을 일괄적으로 지급해야할까? 아니면 죽은 희생자들이 생전에 가졌던 경제 능력과 실적을 반영해 오름차순으로 나열해야할까? 모두에게 같은 가격을 적용해 지불하려 한다면 사회적 고위층 또는 경제적 상위층은 반발할 것이다. 죽은 CEO와 죽은 주방 보조 사이의 급여 차이에 대해 그들은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아니, 그럼 각자의 생전 연봉과 급여에 맞춰 위로금을 산정해? 그렇게 되면 대다수의 여론 역시 좋지 않을텐데? <워스>는 그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번민하고 갈등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그 문제는 바로, 사람의 목숨값이 과연 얼마인가-하는 것.
이는 지극히 이상적인 고민인 동시에, 또 현실적인 고민이다. 사람 마음이야, 당연히 모두의 목숨값이 동일하다고 생각은 하지. 그러나 모두는 모두와 사정이 다 다르다. 죽은 희생자들은 생전 직업과 그 연봉도 모두 달랐지만, 부양해야할 가족의 수와 그 상황의 수 역시 모두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 테러로 인해 가족을 두 명 이상 잃었고, 또 어떤 사람은 외도와 불륜으로 부양해야할 가족이 따로 따로 둘이나 있었다. 죽음의 이유와 타이밍도 모두 달랐지. 여객기가 빌딩에 부딪힌 순간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소방관과 경찰들은 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오랜 시간동안 그 곳의 분진에 의해 병을 얻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위로금을 받아야할 대상 산정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부모에게 그 정체성을 줄곧 부인 당했던 게이 희생자의 위로금은 그가 태어난 버지니아의 주법에 의해 그 연인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 이 서로 다르고 각기 다른 모두의 사정들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품어야하는가.
영화는 <빅 쇼트>와 같은 의도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명백하고 드높은 메시지. 그게 무슨 일이었고 또 어떤 일이었든 간에, 우리와 서로를 서류 안의 숫자로만 보지 말 것. 도표와 수치 속의 '1'로만 보지 말고, 모두 다른 사연과 삶의 궤적을 가졌던 '한 명'으로 우리와 서로를 봐줄 것. 그것은 분명 굉장히 지난하고, 괴롭고, 힘들고, 복잡한 과정임이 틀림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와 서로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태평양 너머 저 멀리에 있는 나라의 9/11 테러 뿐이지만, 지금까지의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지 않았나. 다리가 붕괴되고, 백화점이 무너졌으며, 군인들을 실은 배와 학생들을 실은 배가 속절없이 침몰하지 않았었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워스>의 메시지는 타국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과거를 위로하고 미래를 달래기 위해 지금 이 시점 현재에서 반드시 묶어내야만 하는 매듭. 그 매듭은 결국 노력의 산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노력해야한다.
휴먼 드라마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심지어 스포츠 영화처럼 느껴지는 <워스>의 결말이 살짝 아쉬운 건 사실이다. 런닝타임 자체가 좀 긴 느낌도 있고. 그러나 언제나 시의적절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워스>는 제목 그대로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파운더>와 <스파이더맨 - 홈커밍>, <덤보> 등을 통해 자본주의를 무기로 삼는 탐욕스런 악당 전문 배우로 요새의 커리어를 쌓아가던 마이클 키튼이 그 이미지의 정반대 지점에 서서 목숨값을 셈하는 모습에는 신선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가치있는 이야기와 가치있는 연기에, 가치있는 질문. <워스>는 가치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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