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9 13:13

그린 나이트 극장전 (신작)


아이들의 '순수'와 노인들의 '노쇠', 그리고 인간의 '죽음' 등 다소 추상적인 요소들을 시각화 시키는 데에 출중한 재능이 있었던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신작. <그린 나이트>는 그렇담 과연 무엇을 시각화 시켜 다룬 영화일까? 아마... 명예?

한국 공식 포스터에서 <반지의 제왕>과 <호빗>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기 수준이다. 이건 뭐, 거의 <판의 미로> 사태의 재림. 세상에 마상에 이 영화를 수입해 홍보 하면서 <반지의 제왕>을 언급해버리면 어떡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반지의 제왕>급 스펙터클 눈요기를 기대한채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대체 무어가 되느냔 말이야...

애초부터 엘프나 드워프 등 다른 종족들과 교류하고 있던 세계나 시대가 아닌데도 뜬금없이 등장한 식물 형태의 녹색 기사. 누가 봐도 존나 수상해보이는데 이런 새끼가 게임하자고 달려들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게 정상이지. 그런데도 우리의 주인공 가웨인은 호기롭게 나선다. 딱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 이게 바로 젊음의 패기인 것일까. 패기 넘치는 그에게 녹색 기사가 제안하는 게임은 단순하다. 네가 지금 날 베어내면 1년 뒤 나도 네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널 베어버리겠다는 것. 그러니까 칼로 내 뺨을 가볍게 긁으면, 나도 1년 뒤 네 뺨만 가볍게 긁겠다는 것. 칼로 네가 내 목을 친다면 나도 1년 뒤에 내 목을 치겠다는 것. 아니, 근데 목을 댕강 잘라버리면 너가 1년 뒤에 날 어떻게 칠 건데? 지금 그냥 널 죽여버리면 되는 거 아님? ......이렇게 생각했던 게 가웨인의 패착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 수상한 놈이 수상쩍게 나타나 먼저 뭔갈 제안하면 의심부터 오지게 박고 시작해야하는 겁니다. 하다못해 보험도 계약 도장 찍기 전에 약관 꼼꼼히 읽어봐야하거늘, 왕과 베테랑 기사들의 시선에 부담이라도 느꼈던 건지 가웨인은 게임 룰 곱씹기도 전에 그냥 냅다 칼을 내치려 녹색 기사의 목을 잘라내고야 만다. 엥? 근데 죽은 줄 알았던 이 녹색 기사가 <슬리피 할로우> 마냥 갑자기 자기 잘린 목 붙잡고 겁나 짜증나게 웃어제끼는 거임. 그러더니 "1년 남았다"라고 내뱉으며 혼자 신나게 말타고 떠나는 거임. 어리벙벙한 표정의 가웨인 위로 지나가는 존나 얄미운 자막, "너무 빠른 1년". 좆됐다, 씨바.

중세시대, 가장 중요하게 인정받는 덕목은 아무래도 명예였을 것이다. 기사들의 의리와 신의, 우정. 이 모든 것들이 한 방에 농축되어 담긴 마법의 단어, 명예. 소위 말해 이름값이라는 건데, 그런 자기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면 약속을 어기지말고 지키라는 거지. 그렇게 가웨인은 명예라는 그 단어에 붙들려 괴로운 여정을 떠난다. 솔직히 말해, 그가 떠나지 않는다해도 어떤 패널티는 없었을 것 같음. 안 가고 버팅기고 있었으면 과연 녹색 기사가 찾아와 "씨바, 너 왜 안 와?" 했을까? 딱히 그런 패널티도 없었던 것 같고 데드라인을 어긴 것에 대한 벌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웨인은 떠난다. 그거 다 명예 때문이다. 왕도, 기사들도, 심지어 자기 엄마도 이상하게 눈치 주는 것 같음. 성장하기 싫고 취업하기 싫고 독립하기 싫고 그냥 하릴없이 이렇게 집에 붙어 뭉개고 싶었는데 주위 어른들 눈치와 등쌀에 아니꼬운 표정 지으며 현관문을 나서는 30대 초반 백수 같은 가웨인. 

솔직히 1년 전에 녹색 기사와 붙은 것도 그놈의 명예, 가오 때문이었던 거 아냐? 왕과 베테랑 기사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냥 자기 한 번 증명해보려고 홧김에 붙은 거 아녔냐고. 가웨인은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다. 그러니까, 가웨인의 여정은 사회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길잡이 역할 해주던 새 친구는 알고보니 도적떼 리더였음. 우리도 사회 생활 초반에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뒷통수 세게 맞아보잖아. 그런 거지, 뭐... 이후 가웨인을 유혹하는 이들도 있고, 또 반대로 무서워 보이지만 끝내 은혜를 갚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 조언자 역할을 해주는 여우까지. 하여튼 가웨인의 사회 생활은 험난하기만 하다. 

영화 결말 들어서는 <다크 나이트>의 그 대사가 생각나더라. 하비 덴트의 대사였지, "영웅으로 죽거나, 혹은 오래 살아 악당이 되든가" 가웨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본다. 자신이 구차하게 살아남아 남은 인생을 누릴 경우. 연인은 버려지고 아들은 죽음을 맞이하며, 끝내는 자신과 자신의 왕국도 무너질 것이다. 이 부정적 미래의 가능성을 보자 결국 가웨인 왈, "나 그냥 명예를 지키고 죽겠소" 이게 중세시대의 명예욕을 까는 게 아니면 뭐냐고. 

촬영과 조명이 특히 인상적이다. 거의 성찬에 가까운 시각적 황홀경. 그런데 딱 거기까지. 데이빗 로워리 이 양반 전작들은 그래도 다 쉽게 쉽게 갔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가속 페달을 밟지? 나에게는 좀 과했다는 생각이다. 일반 대중 영화들과는 그 궤가 확연히 다른 작품. 이런 영화를 수입해 홍보 하면서 <반지의 제왕>이랑 <호빗> 들먹이니 내가 빡치는 거라고. 

덧글

  • hermes 2021/08/09 16:37 # 답글

    오프닝에서 "하늘"에서 내려와 왕의 머리에 얹혀졌던 왕관이, 결말부(또는 환상)에 이르러선 잘린 머리와 함께 "땅"바닥에 뒹굴고, 크레딧 이후에는 "인간(여성)"이 그 왕관을 주워 스스로 머리에 얹는다는 서사도 따로 생각해봄직 하다고 느꼈습니다.

    어쩐지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던 오프닝에 등장하던 남녀의 이름이 헬렌과 파리스라는 것도 영화의 시점이 그 신화시대로부터 멀고 먼 시간이 지난 시기라는 것, 신화(마녀-그린나이트)와 문명(왕권-기독교)의 교차점을 다루고 있는 영화임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 rumic71 2021/08/09 18:03 # 답글

    낚이는 관객들이 있으니 저런 짓들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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