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4 15:27

에반게리온 - 서, 2008 대여점 (구작)


이 신 극장판이 개봉하던 시점에도, 이미 이 IP는 사골게리온이었다. 만화책과 TV 시리즈에 이어 극장판들까지. 2차 매체는 VHS와 DVD를 거쳐 블루레이에 안착했고 관련 캐릭터 상품들도 무수히 많이, 굉장히 다양한 종류와 형태로 쏟아져나왔다. 루프물 아니냐-라는 의혹까지 받아가며 결말도 여러번 다시 지었다고. 그랬던 시리즈를 '리빌드'란 명목 하에 다시 부활 시켰던 게 2008년. 이것도 무려 지금으로부터 13여년 전 이야기인데 2021년 시점인 이제와서야 제대로된 마무리를 짓겠다 하니 <서>를 어찌 다시 안 보고 배기겠냐. 솔직히 <에반게리온 - Q>는 기억도 안 나는데. 하이고... 하여튼 참으로 많이도 우렸다. 

우릴대로 우렸다며 사골 취급한 것과는 별개로, <서>는 썩 괜찮은 작품이었다. 기존 시리즈의 팬들은 TV 시리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개 위로 새롭게 쌓인 작화와 테크닉에 열광했다. 여전히 모호한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기존 TV 시리즈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일반 관객들 역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전체 전개를 유지해 고유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도, 세부적인 부분에서만 방향을 틀어 온고지신 하겠다는 그 자세. <에반게리온 - 서>의 이러한 태도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Q>까지 본 지금에서야 다 쓸데없는 소리가 되긴 했지만.

TV 시리즈의 팬이었음에도, 그 후반부와 결말에는 여전히 아리송할 수 밖에 없었던 나다. 이해 가능하고 말고를 떠나 굳이 이런 식으로 훈계를 던지며 결착 지었어야 했나-의 감상에 더 가까움. 전형적인 로봇 애니메이션처럼 시작했다가 마지막엔 메타픽션물로 급 선회하던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때문에 이번 리빌드 기획 만큼은 믿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 내적인 이야기만으로 마무리될 것이라 믿었던 거. 물론 첫작품인 <서>에서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기승전결 구성으로 치면 이제 '기' 단계인 건데.

어쨌거나 TV 시리즈와 그 구성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서>까지는. 그래도 TV 시리즈에 비해 달라진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차이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이카리 신지의 징징거림이 좀 줄었다는 것. 이건 이거 나름대로 대견 하기는 함. 그런데 여전히 어른들의 가스라이팅은 오진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14살 소년을 갑작스레 불러다가 최종결전병기에 타 무지막지한 괴 생명체와 맞서라니. 솔직히 겁 먹고 안 탄다 해도 이해가능한 부분인데, 여기 있는 어른이란 새끼들은 다 "그래? 너가 안 타면 우리 다 죽는 거지 뭐... 그럼 다 너 잘못이지"라는 존나 쿨병 걸린 태도로 일관. 애니메이션이고, 또 이게 장르적 특성이라고 하면 할 말 없긴 하지만 하여튼 말이 안 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세상에 대체 어떤 어른이 이토록 무책임하고 잔인하단 말인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야시마 작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해당 작전의 이야기내 임팩트나 연출적 화려함은 차치하고, 신지에게 부담갖지 말라더니 그가 에바에 타자 무전으로 우리의 모든 걸 너에게 걸게-라고 말하는 미사토. 하고싶은 대로 해~라고 말만 해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하고 눈치주며 부담 얹는 직장내 상사를 보는 것 같아 뭔가 뒤늦은 소름이 밀려왔다.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혐한 발언 때문에 탈덕한지 꽤 된 프랜차이즈였는데, 이제와서 다시 보니 그의 혐한 여부를 떠나 그냥 내 취향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한창 어렸을 적, 그 당시 특유의 세기말적 분위기와 찰떡궁합처럼 느껴졌던 TV 시리즈. 그 때는 분명 재밌게 봤었고 또 열광했었지. 근데 그새 나이를 먹은 것일까, 10여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일종의 추억 보정을 해주고 있던 AT 필드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느낌이다.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오버나, 남성 관객들을 타겟팅한 게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여체 묘사 같은 것들이 분위기를 깨는 기분. PC적 관점을 떠나 그냥 그 분위기를 납득 못 하겠다. 세계가 멸망할 위기에 빠졌고, 실제로 작품내 거시적인 분위기도 시종일관 어두운데 조증이라도 걸린 것 같은 밝음이 자꾸 끼어든다. 폭주한 에바가 상대 사도의 팔을 꺾어 부러뜨리고, 피가 철철 솟구치는 등의 묘사가 마구 나오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맥주 광고. 목욕을 좋아하는 펭귄. 기타등등. 예전엔 이런 장면들에 면역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꼴에 머리 커졌다고 그 사이 면역력이 떨어진 건가. 

기존 TV 시리즈에서도 그랬고, 최근 그가 연출했던 <신 고질라>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확실히 안노 히데아키는 작전광인 것 같다. 액션과 드라마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세계에서 항상 더 강조되는 것은 작전의 계획과 수립이다. 특정 작전은 물론이고 사도가 진격해오는 매 순간마다 제레 사령부의 오퍼레이터들이 소리치듯 내뱉는 보고들 때문에 스피커가 윙윙 거린다. 특유의 그 리듬감이 나쁘지 않고, 또 이게 이 시리즈의 매력이었지- 싶기도 한데 영화외적으로는 좀 깨는 부분도 있었다. 한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모습들이 일본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처럼 여겨졌었다. 암,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저 정도는 껌이겠지. 허나 20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우리는 일본이 우리의 생각보다 선진화 되어 있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였다. 코로나 19 방역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올림픽도 겨우겨우 개최한 지금의 일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도가 줄지어 습격했을 때 일본이 저걸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듦. 

특유의 서정성도 좋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 연출도 여전히 마음에 든다. 그러나 그외 다른 부분들은 이상하게 불만족스러움. 이거 분명 2008년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 영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첫관람과 재관람 사이 내가 너무 커버린 것 같다. 취향이 너무 달라진 것 같다. 원래는 <파>보는 게 설레고 기대 됐었는데, 왠지 점점 숙제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있다. 

핑백

  • DID U MISS ME ? : 에반게리온 - 파, 2009 2021-08-14 15:41:11 #

    ... . &lt;에반게리온 - 파&gt;는 그를 공고히 하는 영화다. 재건축을 위한 대대적 철거. 온고지신의 자세로 기존 TV 시리즈를 받드는 것처럼 보였던 &lt;에반게리온 - 서&gt;와는 완전 다른 스탠스를 취하는 속편. 기존 TV 시리즈의 이야기를 바꾸다 못해 과격하게 박살내버린 전개. 한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게 만들었단 점 ... more

  • DID U MISS ME ? : 에반게리온 - Q, 2013 2021-08-14 16:05:57 #

    ... &lt;서&gt;와 &lt;파&gt;에서 뿌려댄 떡밥들에 대해 A를 제공해야 했던 3편인데, 정작 더 많은 Q만 마구 흘려두고 꽁무니 뺀 영화. &lt;에반게리온 - 파 ... more

  • DID U MISS ME ? :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2021-08-14 16:31:10 #

    ... 평화롭고 좋다. 캐릭터의 여정으로써도 의미있고 알맞다. 그러나 너무 길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신지의 징징거림도 기존 TV 시리즈에 비해 더 강해진 느낌이고. &lt;서&gt;와 &lt;파&gt;에서 덜 징징 거려서 그것까지 합산해 농축 발산한 건가? 왜 갑자기 마지막 편에 와서 이래? 마리는 진짜 깨는 캐릭터. 신 극장판만의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