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6 14:55

스파이더맨, 2002 대여점 (구작)


최초의 수퍼히어로 영화란 타이틀은 리처드 도너가 만든 <슈퍼맨>이 초저녁에 차지한게 오래고, 최초로 실사화 된 마블 캐릭터 타이틀도 캡틴 아메리카와 헐크 등에게 이미 빼앗긴 상황. 하다못해 그 <블레이드>마저 1998년 제작 작품이었으니, 2002년이라면 마블의 트리플 A급 수퍼 스타 스파이더맨으로서는 조금 늦은 스크린 데뷔년도라 하겠다. 물론 판권 분쟁과 CG 기술의 발전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늦게 제작된 것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이 장르 역사 내에서 태초의 존재까지는 아니란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MCU를 필두로 한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 유행의 일등공신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라 답할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가 후대에 남긴 영향은 무지막지하게 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한 문장이 이 시리즈 전체와 스파이더맨이라는 주인공의 행동 지표임을 모르는 이는 이제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책임이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의 어린 피터 파커도 말했다, 이렇게 큰 힘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건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내 책임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스티브 로저스의 모토는 인간애, 토니 스타크의 모토가 양심이라면 피터 파커에게 그것은 곧 책임이다. 그렇담 그 책임의 방향은 어디인데? 무엇에 책임을 느껴야 하는 건데? 뻔하지만 답은 '모두'다. 

어린 피터는 도서관 간다 삼촌을 속이고 찾은 레슬링 경기장에서 응당 받길 바랐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3,000달러 준다더니 핑계를 대며 100달러 만을 피터에게 내미는 관계자. 이에 피터는 부당하다 항의하지만 관계자에게 돌아오는 건 "내 알 바 아니잖아"라는 냉정한 한 마디 뿐. 그러나 상황의 반전은 곧바로 온다. 피터가 터덜터덜 나선 사무실에 강도가 든 것. 관계자를 후려치고 돈을 빼앗아 도망치는 강도. 멀리 그 뒤 관계자가 "저 놈 잡아!"라고 외치지만, 강도와 맞닥뜨린 피터는 그를 잡지 않는다. 오히려 강도에게 자신이 타려던 엘리베이터를 양보하기 까지 한다. 뒤늦게 쫓아온 관계자가 그런 피터를 나무라는데, 이에 대한 피터의 대답이 참으로 걸작이다. "내 알 바 아니잖아요"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 그것은 피터의 '알 바'였다. 피터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 강도는 자동차를 훔치려다 벤 삼촌과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그를 총으로 쏴 살해하게 된다. 그렇게 죽은 벤 삼촌. 허무하게 몇 마디 남기지도 못한채 돌아가신 벤 삼촌. 그 때서야 피터는 깨닫게 된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다 자기 자신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관계로써 엮여있다는 사실을. 남의 문제는 곧 내 문제이기도 하고, 또 그런 남을 돕는 일이 자신 스스로를 돕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 피터는 그걸 뒤늦게 깨닫는다. 아니, 뒤늦게라도 깨달은 게 어디냐. 그를 통해 남을 돕는 수퍼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서 각성 했으니 마냥 뭐라 할 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벤 삼촌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은 피터의 트리거가 된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수행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경이롭다. 아, 과거형으로 말해야지. 경이로웠다. 기술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2002년 개봉 당시에는 놀라운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2021년 아닌가. 더욱 더 진보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점철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판을 치고 또 활개치는 세상이다. 요즈음의 그런 블록버스터들에 비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스파이더맨>의 스펙터클은 여전히 2002년에 머물러 있어 빛이 바랜 것처럼 느껴진다. 허나, 2002년의 <스파이더맨>에는 아름다운 액션 디자인과 놀랍도록 멋진 액션 동선이 존재한다. CG 기술적 측면은 세월에 풍화되지만, 창의적으로 빚은 액션 그 자체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린 고블린이 던진 투척물들을 멋진 동작으로 회피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과, 메리 제인에게 몹쓸 짓을 하려던 동네 불한당들을 순차적으로 거미줄 엮어 패대기 치는 빗속에서의 장면은 재밌으면서도 아름답다. 제작 당시 기준 최고의 CG 기술을 쓰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에만 함몰되지 않고 프레임 하나 하나에 깎아넣은 열정의 연출. 이 영화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련된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고전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란 말이다.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의 정체성은 수퍼빌런을 통해 정립되고 또 발현된다. 그린 고블린이 되기 전의 노만 오스본은 여러모로 피터 파커의 워너비 같은 존재였다. 똑똑한 과학자로서 과학 수재 피터와 동급의 존재였고, 또 돈 많고 성공한 사업가로서 피터가 바라는 삶을 살고 있기도 했다. 그는 피터의 현재였으며 또 피터가 되고 싶은 미래였다. 친구의 아버지란 관계를 뛰어넘는 유사 아버지이기도 했지. 그러나 그랬던 노만은 결국 그린 고블린이 된다. 큰 힘을 얻은 피터가 큰 책임을 느꼈던 것과는 반대로, 노만은 큰 힘에 큰 욕망으로 화답한다. 이후 만들어지는 3편에서 그의 아들인 해리가 똑같은 약물을 주입 받았는데도 그 아버지와 같은 이중인격적 태도가 발현되지 않았다는 걸 보면, 1편의 노만이 가진 욕망과 분노는 이미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었다는 걸 우린 유추해낼수 있다. 애초 본인이 갖고 있던 악한 면이 더 극대화 되어 나타난 악당, 그린 고블린. 그렇게 따지면 또 피터는 애초부터 선한 인물이었다는 다소 운명적인 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 헌데 돌이켜보면, 벤 삼촌을 죽인 강도를 대했을 때의 피터 모습은 영락없는 악당이었다. 이후 벤 삼촌의 유언 아닌 유언을 곱씹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인, 영웅으로 결정한 거지. 고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무언가'이기도 할테지만, 무엇보다 '바로 지금 자신의 선택'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며 가장 기뻤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토비 멕과이어가 우리들이 가진 첫 피터 파커의 얼굴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선하고 순한 얼굴, 수줍고 예쁜 미소,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 했을 때 지어내는 결연한 의지의 표정까지. 아, 이 때의 토비 멕과이어는 정말이지 젊었다. 아니, 어렸다. 토비 멕과이어는 어렸고 커스틴 던스트와 제임스 프랭코는 순수 했으며, 심지어 윌렘 데포 역시 청춘이었다. 2002년, 열두살의 나이로 이 영화를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내게 그냥 아저씨였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다시 보니 그 역시도 젊은 날의 어떤 순간에 붙들려 있었다.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이토록 반가운 경험이다. 

2021년 지금의 우리는 이 프랜차이즈가 앞으로 두 편이 더 나오고, 또 그 이후엔 두 번이나 리부트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토비 멕과이어의 스파이더맨을 앞으로 두 번 밖에 더 볼 수 없다는 것이 벌써부터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의 영향력은 지금의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들 곳곳에 묻고 또 배여있으니 그것에 그냥 만족할 수 밖에. <스파이더맨>은 여러모로, 21세기의 포문을 활짝 열어젖힌 진정한 첫 블록버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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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21/08/16 18:54 # 답글

    배트맨이나 캡틴이 2차대전 때에 나온 대선배임을 생각하면 (심지어 영상화도 40년대!) 60년대에 나온 스파이디야 아무래도 애기죠. 하지만 첫 영상화가 1977년인 걸 감안하면 그리 느린 것도 아닌셈.
  • 포스21 2021/08/18 21:16 # 답글

    후 이제는 이것도 스파이더맨 클래식...이라고 불러야 하는 물건이죠. 세월이란...
  • 로그온티어 2021/08/19 09:46 # 삭제 답글

    이 영화 최고 장점은 정석적으로 재밌기도 하지만 특유의 성벽을 가진 이들도 만족시켰다는 것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숱한 텀블러와 트위터에서 스파이더맨이나 젠타이 성벽을 가진 분들의 다양한 말들과 활동을 보고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면서도 다른 것에 매료될 수 있구나를 느꼈던 지라.

    이 성공여파로 많은 스파이더맨 영화가 나왔으니 그들은 행복했겠지요
  • 잠본이 2021/09/27 19:12 # 답글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을 갖게 해준 멋진 감상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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