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으로서의 액션과 피터 파커로서의 드라마 모두 잡아버린 전설적 속편. 그 안에서도 굳이 따지면 스파이더맨 보다는 피터 파커에 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풀어낸 작품. 21세기 최고의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를 꼽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크 나이트>나 <어벤져스> 등을 언급 하겠지만, 나에게는 적어도 아직까진 이 영화가 1순위다.
영화, 그것도 수퍼히어로 장르처럼 주인공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내적 갈등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고 또 끝을 맺는 영화들을 그리 좋게 보지 만은 않는 편이다. 너무 편리하고 너무 쉽잖아, 시나 소설도 아니고 영화라는 시각 매체에서 주인공의 현재 심리와 목표 등을 그 스스로의 목소리로 내뿜어내는 건. 그러나 이 영화는 그걸 너무 잘했다. 사실 1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내레이션이 좀 뻔한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주인공의 심리, 특히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에 가까운 그 상황을 표현해내는 2편에서는 그게 잘 먹혀들어감. 영화 문법적으로만 보면 여전히 뻔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뉴욕 시내에 큰 이미지로 걸린 메리 제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는 피터의 첫 모습이 너무 짠해 보여 좋다. 그 짧은 순간 직후 생업 전선으로 냅다 던져지는 대비 효과도 마음에 들고.
리차드 도너의 <슈퍼맨> 정도를 제외하면, 수퍼히어로의 이중 생활에 딸려올 수 밖에 없는 현실적 고충들을 면밀히 탐구 해낸 동 장르 영화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팀 버튼에서 잭 스나이더의 최근 버전까지, 브루스 웨인은 종종 배트맨으로 의심 받는 상황에 처하긴 해도 그 때문에 현실적 위기까지 빚지는 않잖나. 태생이 백만장자라 놀고 먹어도 상관 없는 상황이니, 수퍼히어로 생활에만 전념하기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데어데블 역시 백만장자까지는 아니여도 명색이 변호사란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니 먹고 사는 데엔 지장 없을 거고, 고스트 라이더는 애초에 그딴 걱정 안 했고... MCU의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은 그런 이중 생활 자체가 없기도 했지. 수퍼히어로로서의 아이덴티티가 곧 직업이 된 인물들이니. 이 계열 끝판왕인 이안 감독의 <헐크> 속 브루스 배너 역시 신화적 태도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만 주구장창 했을 뿐 딱히 최저시급 계산하는 인물은 아니었잖아.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2>는 바로 그 점에 집중한다. 해결해야할 위기는 많은데 정작 시간은 없다. 구해야할 사람은 많은데 거기에 힘과 시간을 쏟다보니 정작 본인 스스로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되고, 오래 일해온 신문사는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생각이 없어뵈고, 대학교 생활은 엉망에 학점은 구멍이 났으며, 짝사랑 하던 여자와의 관계 역시 지지부진하다. 이 모든 게 다 스파이더맨으로 활동하며 잃은 것들이다. 영화는 그렇게 깊은 고민을 던지면서도 현실적인 순간들을 전시해 관객들의 공감과 웃음을 산다. 아니, 세상에. 대체 어떤 수퍼히어로가 코인 세탁실에서 빨래 하다가 수트 물빠짐 현상을 겪냐고. 브루스 웨인이나 토니 스타크라면 절대 이해못할 현실 속 짠내 가득 에피소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을 샘 레이미는 여전한 고전적 풍미로 잘 엮어냈다. 이후 만들어지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감각을, 또 더 이후 만들어지는 MCU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SNS 세대의 감각을 비벼낸 것에 비교해보면 샘 레이미의 시리즈는 다분히 고전적이고 더불어 다분히 도시 전설적이다. 피터 파커가 어두운 뒷골목길에서 수트를 갈아입고 거미줄 스프린트를 펼치는 장면 등은 진짜 고전 호러 영화처럼 연출되어 있거든. 그렇다고 막 무섭다는 게 아니라, 고전적인 방식의 세트나 미니어처 촬영을 잘 활용한 느낌이란 거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스파이더맨이 TV 뉴스로, MCU의 스파이더맨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통해 목격담이 박제될 것 같다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누가 뭐래도 신문지 1면의 이미지로 구전될 것만 같은 인상이다. 뭔가 현대 뉴욕에서 활동하는 드라큘라 보는 느낌.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역대 배트맨 프랜차이즈 중에서 배트맨이 가장 적은 시간동안 나온 영화였다면, 아마 스파이더맨과 관련해 똑같은 기록으로는 이 <스파이더맨 2>가 비슷한 위치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이 2편과 3편 사이에 잠정 은퇴를 선언 했었다면, 여기서의 스파이더맨은 2편 내에서 은퇴 - 은퇴 번복 - 복귀까지 다 해버림. 그런데 중간에 스파이더맨으로서의 활약 묘사가 전무하다면 지루할 만도 한데, 워낙 피터 파커의 인간적 드라마를 잘 짜놔서 그런 아쉬움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그걸 대충 했더라면 '뭐야, 나 지금 스파이더맨 영화 보러 온 건데 왜 스파이더맨이 안 나오고 있어?'라는 불만이 나왔을 텐데, 피터 파커의 드라마를 보는 순간 만큼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의 핵심이 캐릭터 플레이라는 것을 샘 레이미와 각본가는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1편의 그린 고블린이 피터의 유사 아버지로서 묘사 되었다면, 이번 2편의 닥터 옥토퍼스는 말그대로 피터의 장래희망 쯤으로 표현된다. 과학에도, 사랑에도 성공한 멘토. 피터가 유전자 조작된 거미에 물리지 않고 꾸준히 학업에 정진 했더라면, 아마 그 역시도 그런 모습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노만 오스본이 그랬듯, 오토 옥타비우스도 실수가 초래한 비극과 일련의 잘못된 선택들로 인해 타락해 결국 피터와 맞서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또 좋은 대구다. 닥터 옥토퍼스는 자신이 실패한 과학 실험을 다시 완성 시키는게 본인에게 남겨진 유일한 의무라 믿는 사람이다. 피터도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의무에만 천착 했다면 그리 됐을지 모를 일이란 거지.
이미 나온 1편과, 이후 나올 3편 모두에 갖는 유일한 불만이기도 한데 액션 동선과 합은 완벽하지만 그 안에서의 격투 묘사가 너무 단순하다. 거미줄 활용 능력이나 아크로바틱한 몸짓 자체는 너무 스파이더맨스러운데, 격투만 들어가면 그냥 주먹질. 기술적 차이도 있었겠지만, 이 부분에서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속 그것이 압승이다. 아직도 진짜 거미 마냥 리자드 몸에 올라타 거미줄 감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샘 레이미의 트릴로지에도 그런 게 있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그런데 이미 많이 이야기했듯, 지금 버전으로도 너무 완벽한 영화라서 그냥 꼬투리 잡기에 지나지 않는 사소한 불만이다.
쿠키 영상의 개념과 활용이 지금 같지 않았던 당시에, 해리 오스본이 아버지의 비밀 유산과 마주하는 속편 예고식 장면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극장에서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정말이지 세월이 야속하기만 했더랬지. 오히려 세월이 빨리 흘러갔으면-이란 마음이었다. 들로리안이 실재 했으면 그거 타고 2,3년은 뒤로 점프하고 싶었다. 이 기분 마치 개봉당시 극장에서 <제국의 역습>을 봤던 사람들 같았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물론 요즘의 어린 영화 팬들이야 곧바로 3편 디스크를 찾아 플레이어에 넣으면 끝이겠지만 말이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지. 그냥 넷플릭스에서 검색만 해도 바로 나오겠지.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뭔가 이상한 마무리
뱀발 - 트리플 J 역할에 JK 시몬스는 수퍼히어로 장르 역사에 길이 보전될 황금 캐스팅인 것 같다.
덧글
NRPU 2021/08/19 17:13 # 답글
rumic71 2021/08/19 18:47 # 답글
잠본이 2021/09/27 19:09 # 답글
개인적으로도 슈퍼맨2와 함께 히어로영화의 명작으로 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