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 레이미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3편이 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와서는 너무 유명해진 샘 레이미와 제작사 사이 당시의 갈등으로 인해 수퍼히어로 장르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 작품이었던 이 시리즈는 3편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재밌는 게, 원래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해도, 어쨌거나 3편이 꽤 그럴 듯한 시리즈의 결말을 지은 것처럼 보인다는 거. 욕 많이 먹는 부분이긴 하지만 악당을 셋이나 선정해 시리즈의 최종편으로써 다채로운 스펙터클을 보강한 것도 사실이고, 또 무엇보다 피터와 메리 제인 사이 관계를 어느정도 마무리 지어놨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시리즈에서 가장 떨어지는 영화인 건 팩트.
가장 먼저, 악당의 문제가 있다. 1편의 그린 고블린이 피터의 유사 아버지이자 얼터 에고였다면 2편의 닥터 옥토퍼스는 피터에게 있어 롤 모델 같은 존재였다. 뭐, 결국 개심하기는 해도 타락한 롤 모델이었지. 그에 비해 이번 3편은 어떠한가. 그린 고블린 주니어와 샌드맨은 피터에게 있어 과거에 대한 회한과 분노로 작용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다소 뜬금없는 등장처럼 느껴지는 베놈은 누가 뭐래도 타락에 성공한 피터의 검은 버전. 이렇게 각 수퍼빌런들이 상징하는 바만 본다면, 작가 입장에서 꽤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짰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린 고블린 주니어와 샌드맨은 과거의 일로 인해 망가진 피터의 현재를 상징하고, 또 그들을 벌하고자 흑화한 피터의 모습으로 인해 베놈이 탄생하게 되는 귀결이니까. 주제 의식 면에서만 보자면 다 납득 가능한 부분.
문제는 그 배분이다. 지금까지 딱 한 명씩의 악당만 상대해왔던 시리즈에서 갑자기 그 머릿수가 3배로 뛴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심비오트에 감염된 스파이더맨도 이야기 내에서는 안타고니스트처럼 느껴지지. 그러니까 설명해야할 부분이 배에 배로 뛴 셈. 그러다보니 설명과 분량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물론 그 중에서 그린 고블린 주니어, 고로 해리 오스본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피해를 덜 봤다. 이 인물이야 1편부터 쭉 드라마가 쌓인 구면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그 이야기가 엉망인 건 여전한 사실이다. 초반부의 액션은 멋지지만, 그 직후 골목 쓰레기통에 대가리를 찧고 기억 상실행. 기억 상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소 구리기도 하거니와, 느닷없이 피터와의 우정을 다시금 강조하려는 설정 같아 더 거부감이 인다. 막말로 둘 사이가 절친이라는데, 1편과 2편 통틀어서 그런 느낌까진 못 받았었거든. 둘이 룸메이트도 했었고, 해리가 피터 챙겨준 것도 알겠는데 어쨌거나 친구로서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다시 기억 리부팅 된 이후 꾸민 복수 행각도 웃기기만 함. 죽이면 죽였지, 메리 제인까지 끌어들여서 뭐하는 짓이냐... 사실 너도 걔 전 남친이잖아. 그린 고블린 가스의 영향이 물론 있었겠지만, 그게 또 영화 내에서 잘 묘사 되지는 않고 있어서.
샌드맨 역시 문제다. 모래알 단위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액션 펼치는 거? 시대가 많이 지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볼만한 구경거리다. 그러나 이 캐릭터에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가? 1편에서, 피터는 강도를 도와줬다가 오히려 그 강도의 손에 벤 삼촌을 잃는다. 거기에는 어떤 비극성이 있었다. 내가 충분히 벤 삼촌을 구할 수도 있었다는 비극성. 그러나 3편에서 새로 등장한, 알고보니 벤 삼촌을 직접 죽인 건 샌드맨이었다-라는 설정이 1편의 그러한 비극성을 오히려 묽게 만든다. 사소한 우연의 연속들로 만들어진 현실적 비극이었는데, 갑자기 그게 운명론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거지. 거기서 오는 갭 차이가 좀 크게 느껴지고. 무엇보다 샌드맨으로 각성하는 부분도 너무 설명이 대충이다. 경찰에게 쫓기다가 야외 실험실의 모래먼지 빵야빵야를 맞고 모래인간이 되다니... 수퍼빌런으로서 각성하는 장면인 건데 그걸 이렇게 대충 뭉개고 말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에 화룡점정을 찍는 거, 바로 심비오트와 베놈의 존재다. 무엇보다 심비오트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점,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든다. 갑자기 우주에서 훅 하고 날아옴. 그것도 우리의 주인공 바로 옆에. 이것 또한 매우 운명적이지 않은가. 1편만 돌아보더라도, 피터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 거미에게 물린 것이었다. 스파이더맨으로서의 능력을 얻게 되는 게 그가 아닐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3편에서는 갑자기 운명론적인 접근들이 속출함. 2편에서 메리 제인과 결혼할 뻔한 남자를 굳이 우주 비행사로 설정해뒀었으니, 그와 엮어 심비오트의 지구 반입이 설명되었더라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냥 툭하고 각본가들의 손에 의해 주인공 옆자리로 던져진 느낌이다. 원작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욕 먹었을지언정 차라리 과학자들의 잘못된 실험 산물로 만들었다면 더 이해 가능했을지도...
심비오트는 그렇다 쳐, 베놈은 어쩔 건데? 에디 브록 이 새끼는 진짜 웃기는 새끼다. 금방 뽀록나 자기 커리어 개판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포토샵으로 대충 퉁쳐 데일리 뷰글 입사. 자기 라이벌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까내리고, 심지어는 막판에 성당 가서 누구 죽여달라 살인청부 기도도 한다. 세상에 마상에, 누구 죽여달라는 기도 들어주는 신도 있나? 그걸 들어주면 그게 악마지, 신이야? 그런 의미에서 에디 브록 이놈은 진짜 철없는 미친 새끼다. 더 웃긴 건 첫등장 시퀀스. 자기 애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여자가 방금 고층 빌딩에서 떨어져 죽을 뻔 했었는데, 그냥 손짓으로 인사 대충 한 번한 뒤 스파이더맨 사진 찍으러 감. 정말로 세상에 마상에... 하여튼 이쪽 베놈 보고 톰 하디의 베놈 다시 보면 그쪽이 선녀처럼 다시 보임.
그린 고블린 주니어와의 첫 매치 장면은 꽤 재밌고 좋다. 아버지의 것을 계승하고 또 발전시킨 보드형 글라이더도 멋지고. 그러나 샌드맨과의 액션들은 다소 허무하고, 클라이막스 속 2vs2 매치는 유치하다. 유치한 맛에 보는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도 있는 것이지만, 사실 내 기준 이 시리즈의 1편과 2편에는 전혀 그런 맛이 없었거든. 유치하기는 커녕 세련되고 멋진 연출들의 연속이었다고. 그런데 이 3편의 액션들은... 샌드맨과 베놈의 협공에 속절없이 당하는 스파이더맨을 멀리서 보며 중계하는 TV 뉴스 진행자들의 리액션이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그런 건 그냥 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스파이더맨 가면을 벗고 피터 파커로서 주인공이 돌아다닐 때가 이상하게 더 재밌는 3편이긴 하다. 이미 너무 유명한 피터의 스트릿 댄스 장면이라든가, 아니면 전 애인 굴욕 주려고 재즈 클럽에서 펼친 피터의 라라랜드 장면이라든가... 근데 잘 만들어서 재밌는 게 아니라 뭔가 좀 길티 플레져 같은 느낌임. 손발 오그라들어 보기 힘든데 그게 또 재밌는? 야, 이게 좋은 거 맞냐?
엔딩이 다소 미묘한데, 그래도 나쁘진 않다는 쪽이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또 사과할 줄 알게 됨으로서 어른의 모습에 한 발 더 다가간 피터의 성장한 모습으로 마무리. 그래도 내가 메리 제인이었다면 피터 적어도 당분간은 못 만날 듯.
돌이켜보면 정말 기적 같은 시리즈였다. 1편부터 3편까지 완성도가 못해도 중간은 갔고, 그 중 두 편은 또 장르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었으니. 3편에서 삐끗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가 있었기에 MCU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냥 거기서 만족해야할 듯 싶다.
덧글
SAGA 2021/08/23 12:12 # 답글
CINEKOON 2021/09/22 16:04 #
잠본이 2021/09/27 19:04 # 답글
CINEKOON 2021/10/06 16:01 #
잠본이 2021/10/07 11:46 #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