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이 채 한 번 변하기도 전에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변태를 마치고 다시 돌아왔다. 아닌 게 아니라 샘 레이미의 3편이 2007년 개봉작이었으니 정말로 5년 만에 리부트 된 시리즈인 것. 짧은 텀을 두고 돌아왔으니 여러모로 전작들과 비교될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였을까,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연작은 샘 레미의 그것과 정말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기존 샘 레이미의 3부작에 비해 로맨스 요소가 훨씬 더 많이 첨가 되었다는 것 위주로만 비교 되곤 하는데, 더 큰 차이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만의 미스테리적 요소 추가다. 기존 3부작 속 소시민적 영웅 이미지 마저도 변화를 주고 싶었던 것인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운명이었다는 좀 더 고전적인 영웅 서사로 진행된다. 샘 레이미의 피터 파커는 정말로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지 않았더라면, 유전자 조작된 슈퍼 거미한테 물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굳이 따지면 피터보다 그 친구인 해리 오스본의 역할이 더 고전적인 영웅 서사에 부합됐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광기와 능력으로 그 복수를 하려던 인물이었으니. 하여튼 옆의 친구가 더 있어 보일 정도로 샘 레이미의 피터는 진짜배기 평범남이었단 소리.
이에 반해 마크 웹의 피터 파커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의 유산으로 해결해야할 미스테리를 상속받는다. 생전의 부모가 대체 어떤 일에 연루 되었는지, 왜 그들은 어린 피터를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 등이 순차적인 물음으로 등장하고 피터 역시 이를 쫓느라 바쁘다. 게다가 스파이더맨으로서 능력을 얻게 된 것 역시 그 미스테리를 쫓다가 그렇게 된 것. 덕분에 이 우주의 피터 파커는 큰 힘이 생기기도 전에 큰 책임을 연좌제로 물려받아 버렸다. 그야말로 선택된 자, 초즌 원으로서의 영웅 서사. 애초부터 피터는 영웅이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운명론적인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는 새 스파이더맨으로서 어떠한가. 토비 멕과이어,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과 비교했을 때 마스크를 쓴 상태와 안 쓴 상태의 모습이 가장 상반된 스파이더맨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피터 파커일 때는 소심한 모습 그대로인데, 스파이더맨 마스크만 쓰면 배우나 행사 불려온 개그맨 뺨치는 관종으로 변신. 근데 무슨 지킬 앤 하이드나 헐크가 아닌 이상 결국 소심한 피터 파커 내면에 관심종자로서의 욕구가 잠재되어 있었다는 쪽으로 봐야 타당하겠지. 오스본표 슈퍼 거미에게 이중인격 부여 능력이라고 있는 게 아닌 한.
수퍼히어로로 활동한지 얼마 안 되어 아직까지 어리숙하다는 건 알겠는데, 괜시리 여유 부리다가 일을 그르치는 타입이다. 그러니까 다소 거만한 스파이더맨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는 짓거리가 어째 <스파이더맨 3>의 심비오트 물 먹은 피터 파커 언럭키 버전인 것 같다. 뭐, 나쁘게 말해 거만한 거고 그나마 좋게 말하면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달까. 그런 의미에서 준비성이 부족했던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마스크는 뻔질나게 쓰고 다니면서 정작 리자드 찍으려고 하수도에 설치해놓은 자기 카메라의 이름표는 안 뗐다. 순 미친놈 아냐, 이거? 아, 하긴. 마스크도 벌써 한 번 벗었다. 이제 시리즈의 첫 편인 건데 어린 아이 앞이라고 만만히 봤던 건지 마스크 그냥 훌렁훌렁 벗어던짐. 심지어는 그 아이에게 잠깐 빌려주기까지 한다.
피터 파커로서도 문제가 많다.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돌아서서 잠수 타버리는 인물 정도로 묘사된다. 사실상 벤 삼촌도 그래서 죽은 거고... 여자친구랑 멀어지기로 그 아빠와 약속 했더라도 남자친구였으면 최소한 여자친구 한 번 직접 만나서 사정 설명하고 이별하는 게 예의 아니냐? 이쯤되면 문자 메시지나 전화 한 통으로 이별 통보하는 방식이 선녀처럼 보임. 그래놓고 막판엔 또 들이대고. 이미 죽은 사람 소원 안 들어주는 거야 그렇다치는데 그 태도마저 재수없으니 영 비호감으로 밖에 안 보이게 된다. 하여튼 여러모로 뭔가 존나 충동적인 새끼다.
로맨스 요소가 많이 첨가된 수퍼히어로 영화로 유명한데, 첫 감상할 땐 몰랐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어째 둘의 로맨스가 좀 갑작스럽단 느낌이 든다.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으로 첫 사랑의 순간을 박제 해둔 건 간질간질해서 좋은데, 거기까지 닿는 데에 별 과정이 없었던 것만 같아서. 여기에 상술했던 피터 특유의 충동적인 요소까지 곁들여지니, 진짜 사랑해서 만난다기 보다는 그냥 타이밍 맞아서 사귀는 것 같단 느낌만 강하게 듦.
그렇지만 다른 건 몰라도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 통틀어 액션 하나는 최고다. 물론 액션의 동선은 샘 레이미의 3부작에 밀리고 CG와 특수효과는 MCU의 그것에 딸리는 게 사실이지만, 거미 특유의 동작을 재현해낸 스파이더맨 특유의 액션 안무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압승이다.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리자드와의 격투를 그래서 좋아한다. 천장 위에 붙어 유인하거나 리자드의 몸 곳곳을 기어 다니며 거미줄로 감싸 묶어버리는 묘사는 진짜 거미 같아 마음에 든다. 또, 웹스윙할 때 1인칭 시점 쓴 건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임. 사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만한 아이디어고, 또 샘 레이미도 종종 썼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잘 쓰진 못했었다. 이런 부분들은 이 시리즈의 압승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감상주의적인 연출이 너무 많아 그 좋은 점들까지 빛이 바래는 느낌인 것도 사실이다. 크레인 장면은 정말 봐도봐도 열 받음. 오그라드는 건 물론이고 일단 그게 스파이더맨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크레인 덕분에 웹스윙할 수 있었다고? 그냥 건물들 이용해 웹스윙 해도 됐었잖아. 꼭 크레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 있었다면 그걸 잘 보여주고 시각적으로 잘 살렸어야지. 어쨌거나 이건 연출의 실패. 그 전개를 만들려고 TV 뉴스가 작위적으로 설정된 것 역시 마음에 안 들고.
메인 빌런인 리자드의 욕망과 동기는 얼핏 이해 되건만, 그 액션이 재밌지는 않아서 영 흥미가 안 간다. 아, 그리고 리자드 연구복은 갑자기 어디서 났대? 원작 오마주의 의미로 입힌 가운인 것은 알겠지만 도마뱀 된 주제에 굳이 연구 가운까지 찾아 입었다는 게 너무 웃긴다.
몇몇 좋은 부분들이 분명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 내키지 않았던 새 시리즈의 시작.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3부작 쯤으로 천천히 마무리 했으면 어땠을까. 개봉 당시엔 몰랐다, 이 영화가 2편까지 밖에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덧글
SAGA 2021/08/29 14:28 # 답글
벤 파커 분량을 통채로 날려버린 MCU 버전 스파이더맨도 아이언맨의 입을 통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대명제를 어레인지 해서 등장시키는데... 이건 뭐 그런 것도 없고...
CINEKOON 2021/09/22 16:05 #
잠본이 2021/09/27 19:01 # 답글
무리수가 많긴 하지만 지금와서 보니 또 귀엽기도 하고 그래서 복잡한 심정이죠.
CINEKOON 2021/10/06 16:01 #
잠본이 2021/12/22 1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