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30 17:50

레미니센스 극장전 (신작)


<레미니센스>는 짐짓 잡다해 보인다. <블레이드 러너>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분위기, <차이나타운>과 <화차>의 전개, <인셉션>의 소재, 최근 <조커>에서도 봤던 계급 간의 갈등 묘사 등등. 여러 기성 영화들을 마구 뒤섞어 나온 영화처럼 보여, 그 자체로의 오리지널리티는 굉장히 옅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영화 자체의 만듦새 역시 좋다 말하기 어렵다. 계급 간의 갈등은 한 살인사건의 진범을 설명하기 위해 억지로 쑤셔 넣은 느낌이고 그마저도 깊게 다뤄내지 못한다.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수사극으로써의 역할도 형편없다. 이 영화는 '수사'라는 개념을 모른다. 누군가를 추적하는 일도, 그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캐내는 일도 모두가 일사천리다. 장애물이랍시고 허수아비 세워둔 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영화가 짠하게 나를 후벼파는 구석이 몇 군데 있었고 그 몇 구석이 생각보다, 예상보다 더 깊게 뚫렸다. 통째로의 영화보다 몇 개의 씬이 남는 영화. 전체보다 부분의 합이 더 큰 영화. <레미니센스>를 마음 바깥으로 밀어낼 수만은 없는 개인적인 이유다. 

영화는 과거 기억의 편린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반쯤 망해버린 현실 속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온전했던, 또 찬란했던 과거를 붙잡기 위해 레미니센스라는 과거 기억 재생기에 집착하게 된다. 밥벌이를 위해 그를 주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고객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기도 하는 베니스터. 그러나 메이라는 여자가 그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다시 순식간에 빠져나간 이후부터는 그조차도 달라진다. 메이와의 달콤했던 추억들을 곱씹기 위해 마약에 중독되듯 레미니센스에 녹아드는 베니스터.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이 기억은 과거완료형의 형태일 뿐. 이미 정해진, 또 이미 알고 있는 미스터리하고 슬픈 결말 말고 그 다음의 전개를 갈구하는 베니스터.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메이를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런데 웬걸, 나의 기억과 남들의 기억을 파헤치면 파헤칠 수록 메이 이 여자 이상하다. 어쩌면 내가 알던 그 여자를 진짜 메이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싶다. 그렇게 베니스터는 미스터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전적인 이야기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모든 게 사기였던. 팜므파탈에게 배신당한 남자. 그리고 그 팜므파탈과 연관된 범죄 조직, 부패 경찰, 여기에 이 모든 걸 계획한 대부호까지. <레미니센스>는 그 설정부터 내용까지 노골적으로 고전의 형태를 추구한다. 휴 잭맨은 여전히 멋지지만, 그럼에도 레베카 퍼거슨이 더 눈에 띄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레베카 퍼거슨은 이미 <위대한 쇼맨><미션 임파서블 - 폴아웃> 등을 통해 고전적인 여배우 이미지의 현대적 재해석을 잘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휴 잭맨을 비롯해 여러 좋은 배우들이 나옴에도 레베카 퍼거슨에 더 집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처럼 보인다. 고전주의 영화에 고전주의 여배우. 게다가 역할은 또 미스터리의 중심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팜므파탈. 레베카 퍼거슨이 아니라 다른 배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또 어땠을까. 기대보다 걱정의 마음이 더 먼저 드는게 사실이다. 

이처럼 기본 설정이 나쁘지 않다. 조금 뻔하더라도 고전주의적 풍미로 감질나게 잘 그릴 수 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정작 수사물로써 실패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모든 게 다 일사천리다. 마이애미 경찰과 검찰이 쉽게 찾지도, 쉽게 검거하지도 못했던 범죄조직의 우두머리 조를 우리의 주인공이자 민간인에 불과한 베니스터는 열차 한 번 타는 것으로 가볍게 찾아낸다. 제아무리 전직 군인이었다한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심지어 그는 조와 그 부하들을 모조리 탕진하기 까지 한다. 물론 여기엔 그의 동료인 에밀리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더불어 이후의 수사 전개들 역시 모두 급물살을 탄다. 아니, 급물살이라기엔 너무 무(無)물살이다. 어딘가에 가면 꼭 누군가가 있고, 또 그 누군가는 쉽게 힌트를 흘려준다. 베니스터는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으로 수사해내지를 못한다. 그냥 각본가가 정해준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다. 

그렇다면 그토록 찾기 바쁘던 미스터리의 진실은 어떤데? 굉장히 큰 SF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해두었는데 그에 비하면 미스터리의 해답은 소박했다. 결국 이 모든 게 또 부유층의 가계도 가지치기 프로젝트였다니. 미스터리의 결말과 주인공의 여정, 그리고 영화의 거시적인 배경 이 삼박자의 주제가 모두 엇박자를 치고야 만다. 과거에 붙잡힌 사람들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계급 간 격차로 트는 진풍경. 물론, 부자들은 과거의 실수마저 돈으로 바꿔낼 수 있다-라는 주제를 굳이 굳이 파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건 정말 일차원적인 해석인 거고, 난 그 이상이 있을 줄 알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마냥 놓을 수만은 없는 이유. 종종 훌륭한 연출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과거에 빠져 현재를 허우적대 보내는 베니스터의 모습이 안쓰럽고, 여기에 기억 재생기 속에서 메이와 겨우 다시금 조우하는 그의 모습 역시 슬프도록 아름답다. 과거의 연인이 미래의 연인에게 현재를 살아가라고 써보내는 러브레터. 조금 뻔하고 유치하더라도 그 순간의 이미지가 나를 홀려댔다. 물이 넘실거리는 마이애미의 풍경, 옥상에서 펼쳐지는 액션 등의 순간들 보다 <레미니센스>는 내게 이 순간의 이미지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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