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가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계열의 만신전에 오른 <사랑의 블랙홀>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노력을 얼마나 열심히 하든 간에, <팜 스프링스>는 결국 <사랑의 블랙홀>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다. 심지어는 뒷심이 딸리고 연출에 아쉬운 부분들도 많아서 <사랑의 블랙홀>에 비할 바는 못 되겠단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사랑의 블랙홀>과 비교해보아도, <팜 스프링스>는 고유의 매력이 있는 타임루프 영화다. <사랑의 블랙홀>은 2월 2일 경축절의 펑서토니를 무한히 반복되는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영화의 어느 부분을 다시 떠올리든 우리를 춥게 만들었다. 눈이 하얗게 쌓여있고, 사람들은 두툼한 코트를 입은 계절. 그리고 여기에 곁들여지는 빌 머레이 특유의 무신경하고 무기력한 표정. <사랑의 블랙홀>은 그렇게 기억되는 영화이지 않나. 이에 반해 <팜 스프링스>는 한없이 따뜻하고 온기 넘치는 팜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한다. 태양이 내던지는 온기는 따사롭고, 여기에 하와이안 셔츠와 수영장이 더해진다. 그리고 여기에는, 특유의 장난끼 넘치는 표정으로 잔뜩 찡그린 앤디 샘버그의 얼굴이 있다. 냉 버전의 <사랑의 블랙홀>과 온 버전의 <팜 스프링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쌍의 페어가 아닐 수 없다.
따뜻한 나라, 따뜻한 동네에 살면 행동거지가 느려지고 낙천적인 삶을 살게 된다 하지 않던가. <팜 스프링스>의 주인공 나일스가 딱 그렇다. <사랑의 블랙홀> 속 필은 반복되는 하루의 저주에 끝내 깨달음을 얻었어도 여전히 짜증난 투였다. 지겹고 귀찮고. 하지만 날씨가 그래서인가, <팜 스프링스>의 나일스는 그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를 매 순간 즐기려 노력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그조차 이골이 나있을 수 있다. 너무 너무 오랜 세월을 이 하루 안에 갇혀 살아왔으니. 그래도 필에 비하면 나일스의 태도는 활력이 넘친다. 매일이 반복되고 매 순간이 똑같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 상황 안에서의 절대자가 되어 잠시나마 군림할 수 있는 여유. 운 좋게도 그 반복되는 하루가 남의 결혼식이라는 것 역시 그에겐 이점이다. 결혼식이라니, 새로운 여자와 새로운 술이 넘쳐날 수 밖에 없는 상황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이 저주의 사슬을 끊으려는 사라의 제안을 나일스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역시 이해된다. 그는 어린 아이다. 새롭게 찾아올 두려운 내일 보다, 조금 지겹더라도 미래의 걱정과 모험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 오늘에 남고 싶은 것. 이게 철 없는 어린애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러나 사라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녀 역시 처음엔 분노하다 이내 잠시나마 이 하루를 즐기게 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모든 건 결국 그녀에게 휴가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만사 다 제쳐두고 생각없이 쉬고 놀 수 있었던 휴가. 다만 그녀는 현재의 죄책감 때문에 여기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거고. 그리고 현생에서 하고 싶었던 것과 이룰 게 많았던 거고. 그래서 나일스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된 거고.
영화가 젊어서 좋았다. 젊은 시절의 객기와 두려움, 그리고 그 극복까지 모두 보여주어 좋았다. 여기에 특유의 낙천성과 대사도 좋고. 뻔하긴 해도 마지막 동굴 앞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나누는 문법 대화는 재밌더라. 역시 코미디는 말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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