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세븐> 스타일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 범죄 장르이기도 하고, 피해 여성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후배에게 다시 전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도움이라는 게, 결국엔 살인 행각을 덮어주고 감춰주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어감에 마냥 가까운 '도움'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더 리틀 스포일러!
LA를 공포로 물들인 여성 매춘부 연쇄 살인 사건. 이미 그 자체로도 자극적인 소재인데, 여기 우리의 주인공으로 소개되는 인물마저 두루뭉술 미스터리한 느낌을 내보인다. 해결하지 못했던, 그리고 벗어날 수 없었던 과거에게 끝까지 발목 잡히는 주인공. 그렇게 노련하지만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베테랑과, 혈기왕성하고 능력까지 있는 신입 에이스 형사의 조화. 여기에 굳이 따지자면 그 둘이 각각 흑인과 백인. 데이비드 핀쳐의 <세븐>을 떠올리지 않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잡지 못한 범인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또 <살인의 추억>이나 <조디악>과도 겹쳐보인다. 그러나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 구원을 다룬다는 것. <살인의 추억> 속 박두만과 서태윤은 끝내 구원 하지도, 구원 받지도 못했다. <조디악>의 로버트 역시 그저 침잠하며 그 여정을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었지. 그에 비해 <더 리틀 띵즈>의 주인공은 구원 받았고, 또 구원 해줬다. 재밌는 건, 그게 범인에게 죽은 여자들에 대한 구원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여자들은 이미 죽었다. 범인은 이미 놓쳤다. 그러니 여기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은, 결국 사건을 쫓던 그들 뿐이다.
과거 오발 사건으로 피해 여성을 죽인 주인공은 그 동료들의 도움 아닌 도움으로 구원 아닌 구원에 가까워진다. 물론 스스로는 속이 썩을대로 썩어서, 평생을 그 환영에 갇혀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은 건 도움을 받은 거다. 이 역시도 상술했듯 그냥 '도움'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려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하여튼 남은 여생을 집에서 보낼 수 있게 된 것만도 어디인가. 그리고 그렇게 도움을 받았던 선배가, 이번엔 후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선배는 말했지, 범인은 작은 것들 때문에 잡히고 우리는 작은 것들 때문에 망가지는 거라고. 선배는 후배에게 기어코 빨간 머리핀을 선물한다. 죽은 이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범인이 된 셈이지만 당연하게도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더럽게 깐족거렸던 건 사실이잖아. 그렇게 범인으로 의심받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던 관심종자의 죽음 덕분에, 또는 때문에 사건은 일단락 된다.
여러모로 존나 아이러니하긴 하다. 죽을 만한 인물이 죽은 것 같긴 한데, 정작 따지고 들면 그가 정말로 죽을 짓까지 한 건 아니었잖나. 나였어도 죽이고 싶었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형사가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결국 죽을 만한 인물은 죽었고 형사는 죽였다. 여기서 그냥 끝났어도 찝찝했을 텐데, 주인공은 한 술 더 뜬다. 스스로 내린 마음 속의 평화. 죽인 자는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냈겠지만, 그 무게감은 고스란히 선배에게 전해졌을 테지. 이 정도면 현실적 의미로 참 선배고, 종교적 의미로 대속이다.
감독인 존 리 행콕은 아직 그 자체로 브랜드 네임이 되지는 못한 인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크리스토퍼 놀란, 또는 봉준호처럼 포스터에 걸린 이름만으로 관객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급수는 아직 못된 것.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의 영화들에 감탄해왔고, 또 언제나 그의 이름을 믿어왔다. 인간 드라마를 주로 다루었던 그의 전작들이 대체로 모두 훌륭했으니. 그 점에 있어서 바로 직전 작품인 <하이웨이맨>과 이번 <더 리틀 띵즈>는 살짝 걱정했던 것도 있다. 왜냐면, 그 둘이 존 리 행콕에게 있어서는 조금 어색할 수 있는 장르 영화였기 때문. 그 때문인지, 이 두 편이 그 이전의 다른 인간 드라마 작품들에 비해 조금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허나 존 리 행콕의 평작들은 다른 어정쩡한 감독들의 명작 이상이다. 존 리 행콕은 일정부분 증명 해낸 것이다. 자신은 장르도 잘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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