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7 22:07

오징어 게임_SE01 연속극


한창 언급되고 있는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아리스 인 보더랜드> 같은 작품들은 애초에 내가 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거 빼고 봐도 기시감 쩌는 프로젝트인 건 사실이다. 살기 위해 서로 죽여야 한다고요? <배틀로얄>이랑 또 그걸 어레인지한 <헝거 게임>이 있잖아요. 어딘가에 갇혀서 미친듯이 뛰어야하는 거? <메이즈러너> 시리즈도 있고. 그리고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조차 결국 경마장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설정, 이건 또 <노브레인 레이스>잖아. 장르와 분위기는 완전 판이하지만. 때문에 표절 논란은 말그대로 '구태여'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조차도 표절이라고 선 그어버리면 이 하위 장르의 전체 맥락과 기틀이 흔들릴 수도 있다. 물론 전체적인 설정이 그렇다는 거고, 부분부분 뜯어보면 너무 비슷해서 좀 짜증나는 부분들도 종종 있지만. 

2008,9년쯤 기획된 시나리오라고 들었다. 그렇게 10여년간을 표류하다 넷플릭스라는 임자를 만나 꽃을 피운 거라고. 근데 인터뷰에서 그러한 사실을 전해듣고 나서 감상해 그런가? 시리즈의 1,2화에서는 묘하게 200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들에서 많이 나던 냄새가 나더라. 인물들 각자의 하드코어한 상황도 그렇고, 게임장 바깥 현실들을 묘사한 로케이션들도 그렇고. 또 여기서 동시에 끼어든 불만. 호흡이 너무 길다는 것. 각 씬은 물론이고 각 쇼트의 길이들 마저 적정 수준에 비해 살짝씩 더 긴 느낌. 그 느낌이 2000년대 한국영화들 특유의 분위기를 더 가중시킨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보통의 이런 이야기들에서 인물들 전사는 1화에 몰아넣고 2화부터 본격적으로 게임 시작하는 전개잖아? 하지만 오히려 이건 반대더라고? 1화부터 냅다 게임 시작한 다음 2화에서 이들을 한 번 풀어준다. 이건 분명 예상 밖이었다. 그래도 1,2화의 미덕이라고 해봤자 이게 다였다고. 하여튼 1,2화까지는 살짝 팔짱 끼고 봄.

반전은 3화부터, 전체 시즌의 중간부터, 한마디로 오징어의 몸통부터 시작된다. 게임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이후부터 이야기의 전개와 연출이 살아나는 것. 특정 배우들의 연기가 가끔 연극 톤으로 과한 경우가 있어 전체적인 앙상블이 깨지는 순간도 있지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몰입을 크게 방해하는 부분이 없다. 넷플릭스답게 잔인하고 선정적인데, 또 때로는 팀 버튼이나 웨스 앤더슨처럼 기괴하면서도 예쁘기까지 해. 그리고 무엇보다 캐릭터들을 잘 배치해놨다. 쌍문동의 성기훈을 중심으로한 주인공 연합과, 그에 맞서 악의 포스를 활활 풍기는 장덕수 군단의 대치. 이 대치를 통해 주인공 파티원들 모두에게 적절한 정을 쌓아줘놓고 나중엔 가차없이 끌어내림. 그 부분에 있어 제일 큰 공을 세우는 건 역시 박해수의 조상우일 것이다. 

성기훈과 조상우는 여러모로 안티테제처럼 느껴진다. 멍청이 vs 엘리트, 블루 칼라 vs 화이트 칼라, 낙오자 vs 실패자, 이상주의자 vs 현실주의자 등등. 이런 종류의 영화나 드라마들에서 대체로 중요시 여겨지는 건 게임의 허점을 공략할 수 있는 주인공의 지략과 전략이다. 그런데 정말 재밌게도, <오징어 게임>의 그 역할은 성기훈이 아닌 조상우에게 주어진다. 그럼 성기훈은? 이 양반은 <배틀로얄>이나 <헝거 게임>의 세계관에 떨어졌으면 진작에 죽었을 인물이다. 사사로운 정과 인맥, 그리고 거기서 부터 비롯되는 운으로 어찌저찌 계속 살아남는 인물. 이 묘한 설정과 그에 따른 대립이 재밌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줄다리기 등, 오징어 게임 속 대부분의 게임들은 다 어린애들 놀이로 부터 비롯된 것. 그 옛날 놀이터와 운동장 한 구석에서 놀 때도 실력과 체력은 중요했지만, 그게 전체 게임의 승패는 좌우할 수 있었을지언정 유일한 필승 전략인 건 아니었잖아. 어린애들 놀이에서 의외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인맥과 친화력이지 않았나. 그 관점에서 본다면 성기훈 역시 대단한 실력자였던 것. 

전체 게임의 맥락이나 진행도 재미있지만, 어쨌거나 현실적인 맛은 다소 떨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상술했듯, 그렇게까지 신경쓰이는 부분들은 또 아님. 몰입이 깨질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같은 아쉬움은 이후 시즌에서 차차 해결해나가면 될 터. 그럼에도 끝까지 딱 하나 짚고 싶은 것은 위하준의 황준호다. 황준호는 뻔해보였던 이 드라마와 이 게임의 유일한 변수였다. 현직 형사가 게임의 존재를 알게 돼. 그리고 그 안을 마구 헤집으며 조사를 한다구. 그걸 위해, 그 캐릭터의 꾸준한 생존을 위해 각본도 계속 틈을 내어주고 있잖아. 일꾼들은 상급자가 먼저 허락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 장기밀매를 하던 동료는 그의 변명을 그냥 일축해버리는 등. 각본이 계속 이 캐릭터에게 배려를 해주고 있는데도 정작 뭐 써먹은 게 없다. 아직 죽은 것 같지는 않으니 이것도 시즌 2에서는 나아지려나. 

어쩌다보니 마지막화인 9화의 결말부만 두번 보게 되었는데, 이전 에피소드들과는 그 결이나 톤이 완전하게 다른 느낌이 참 좋았다. 남들은 목숨을 걸었는데 자신은 재미만을 추구 했던 오일남, 그리고 그를 통해 대변되는 부르주아들의 인식이 역시나 불쾌하기도 했고. 그나저나 이 할아버지는 첫 게임이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신나게 웃으며 날아다니길래 '아, 역시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인과 관계가 반대였다. 즐겨서 이긴 게 아니라, 이길 수 밖에 없었기에 즐길 수 있었던 거임. 그런 부분에서는 공평함을 추구한다 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불공평할 수 밖에 없었던 이 게임, 그리고 그 게임을 닮은 우리의 세계를 다시 한 번 더 돌아볼 수 밖에 없었고. 

시즌 2 나오겠지. 표절까진 아니라고 이야기 했었지만, 그래도 전세계적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으니 향후 시즌에서는 아예 그런 여지를 안 남겼으면 좋겠다. 세상에, 전세계 시청자들이 달고나 뽑는 걸 보게 되다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던 그 옛날 말 그저 고리타분한 걸로만 여겼었는데, 세상 진짜 급격하게 많이 바뀌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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