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통의 사각지대에 있던 시골 마을. 학교까지 가는 기차를 타려면 꼬박 2,3시간을 걸어가야만 했던 그곳.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직접 간이역을 건설하고 이에 '양원역'이란 이름까지 지어붙인다. 그야말로 마을 사람들이 이루어낸 기적. 여기까지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 한다. 조금 뻔하고 촌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감동적이잖아. 그리고 힘을 합쳐 으쌰으쌰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미지도 곧바로 그려지고. 아마 제작진도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누가봐도 딱 영화 만들기 좋은 소재이니. 그런데, 제작진들은 이 마을 사람들만으론 좀 부족하다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주인공이 될 '누군가'는 필요하다 본거지. 그래서 주인공 노릇할 만한 인물을 갖다 붙였는데... 이게 잘 붙었는지... 굳이 붙였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스포일러가 있는데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스포일러가 있다고 경고하는 것 자체가 곧 스포일러 할 만한 무언가가 있단 소리니 곧 스포일러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스포일러 표시를 안 하기엔 너무 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 하는 것 같아 스포일러긴 해도 스포일러 주의라고 쓸 수 밖에!
주인공으로 간택된 건 기관사인 아버지와 그 아래 누나를 둔 고등학생 준경이다. 아주 이해가 안 가는 선택인 것은 아니다. 마을 이장처럼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이야기에 별 재미가 없겠지.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남고생 정도면 주인공으로서 선방한 편......이라고는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준경이가 그냥 평범한 남고생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고딩은 <뷰티풀 마인드> 속 존 내시의 정상적인 버전 정도로 정리되어 있다. 이런 시골 오지 마을에 그냥 짱박혀 있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국가가 탐낼 만한 수학적 인재인 것. 준경은 수학도 잘하고, 등하교를 위해 매일매일 그 먼 길을 걸어야만 하는 성실함과 인내도 지녔으며, 여기에 소녀시대 윤아를 닮은 같은 반 여고생의 짝사랑 대상이 되기도 하는 등 인기도 있다. 이렇게 정리하니까 더 분명해진다. 아니, 주인공이 꼭 이런 인물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나? 이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시골 마을 사람들이 대한민국 최초의 민자역사를 만들어내는 내용이잖아. 그런데 꼭 그 주인공이 호감가는 완성형 수학천재 소년일 필요가 있었냐는 소리지. 건축천재도 아니고 수학천재... 화룡점정으로 얘가 수학자나 건축가, 또는 기관사의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작 얘 꿈은 미국 NASA에 들어가 천문 관련 연구를 하는 것. ......민자역사 짓는 거랑 천문에 대한 꿈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러니까 이야기가 되게 생뚱맞은 구석으로 몰려간다. 양원역에 대한 주인공의 의지만 앙상하게 남은채, 나머지는 그저 1980년대라는 레트로한 풍경 속 레트로한 사랑 이야기. 말이 좋아 레트로지, 그냥 구식에 가깝다. 물론 추석 대목을 노리고 개봉된 작품답게 영화는 따뜻하고 또 순수하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거다. 하지만 2021년 지금 현재의 기준에서 보기에는 순수하다기 보다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순진한 기색에 더 가까워 보임. 이야기는 물론 인물들도 죄다 답답 하거든. 아니, 그리고 레트로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기엔 또 후반부 들어 너무 무너짐. 준경의 상대 역할인 라희는 무언가를 채 쌓아보기도 전에 갑자기 퇴장하고, 그 자리를 이어 받는 건 결국 준경의 누나인 보경이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그 보경이가 이 영화를 그나마 살렸다.
박정민과 이성민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다소 뻔한 느낌이 들고, 윤아는 생각 이상으로 잘 해냄에도 캐릭터에 별 재미가 없다. 하지만 이수경이 연기한 보경은 이 영화의 유일한 느낌표다. 물론 그녀의 캐릭터 역시 뻔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떠올릴 만한, 시골 촌년의 이미지. 촌스럽기로는 거의 끝판왕이라, '동백꽃'의 점순이와 비슷하다. 당장이라도 "너, 봄감자가 맛있단다"하며 감자를 건넬 것만 같다. 그런데 목적이 노골적으로 분명한 그 캐릭터에, 결국 보기 좋게 당해버렸다. 보경이는 이 영화 속에서 가장 큰 반전을 쥐고 있는 인물이고, 그로부터 비롯된 가족애와 남매애가 영화의 중후반부를 그나마 지탱한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이수경의 연기가 정말로 순수하고 귀엽다. 영화를 다 보고 검색해보니 내가 아주 처음 만난 배우는 아니었던데, 그래도 언젠가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다시금 반추 해볼 적엔 <기적>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좋은 배우들의 뻔한 연기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쾅하고 찍히는 대목.
그럼에도, 이 평범해서 반짝이는 이야기에 두 번의 반전씩이나 넣어가며 배배 꼴 필요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알고보니 보경이가 귀신이었다는 <식스 센스>급 반전은 그 자체로의 효과는 강력하나 곰곰이 곱씹어볼 수록 개연성에 구멍이 뚫려있다. 하지만 더 아쉬운 건 두번째 반전. 이건 드러내놓는 타이밍도 어정쩡할 뿐더러, 그 존재 때문에 영화가 딱히 더 좋아지지도 않는 것 같다. 그냥 있으나 마나한 반전인 것 같음. 물론 딴에는 아버지의 부성애도 넣어보려는 시도였겠지마는...
결론. 나쁜 영화인 것은 아니다. 특유의 순수함도 좋고, 이수경의 순진한 연기도 괜찮다. 하지만 여전히, 이 내용에 이 주인공일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하긴, 그냥 마을 안에서만 쿵짝쿵짝하는 이야기였어도 진부한 건 매한가지였을 테지. 그래도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건 내 우주에 존재하는 이 <기적>뿐이잖아. 아쉬운 건 그냥 아쉬운 거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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