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6 15:22

제인 에어, 2011 대여점 (구작)


개봉 당시에는 놓쳤던 영화인데, 왜 10여년이 지난 이제와서야 다시 보느냐. 그건 바로 감독 때문이다. 캐리 후쿠나가. 일본계 미국인으로 그 성씨부터가 눈에 확 띄는 이름인데, 다름 아니라 이 사람이 이번 <007 - 노 타임 투 다이>의 감독으로 선임 되었기 때문.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의 <007> 시리즈에서 감독이 미국인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이 영국인이었고, 유일한 외국인 감독으로 남은 게 마틴 캠벨과 리 타마호리. 검색해보니 둘 다 뉴질랜드 출신이더라. 하여튼. <노 타임 투 다이> 역시 원래는 영국인 감독 대니 보일이 주도 했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제작자와의 견해 차이로 인해 그가 하차하고, 이후 후임자로 들어온 게 바로 캐리 후쿠나가인 것. 문제는 내가 그의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TV 시리즈 연출도 종종 했던데, 그가 관여 했다는 <트루 디텍티브>와 <매니악> 역시 본 적 없어서. 바로 그 때문에 궁금했다. 대체 이 양반은 어떤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길래 그 보수적이라는 <007> 프랜차이즈가 전통 아닌 전통까지 깨가면서 선임한 미국인인 것인가. 

그래서 그의 영화 연출작들을 찾아보기로 했고, 그게 딱 세 편이더라. 근데 첫 작품은 구하기 어려운 독립 영화인 듯하고... 고로 첫 타자로써 골라잡은 게 바로 <제인 에어>. 이 작품부터 바로 특이하긴 하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문학의 고전 리메이크인데, 감독은 또 일본계 미국인임. 뭐, 같은 영어권 국가고 덕분에 문화권도 유사하게 묶이니 아주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겠는데 그래도 대체 이 감독의 어떤 비전을 봤길래 신인 상태의 캐리 후쿠나가를 기용한 거냐고. 

앞서 말했듯 일단은 영문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을 소설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미 영화화도 수차례 되었고, 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 제목을 들어보지 않은 자는 별로 없을 정도의 유명세. 이런 경우에 특별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딱 하나다. '어떤 차별점이 있는가.' 리메이크로써 단 한 가지의 차별점도 없다면 똑같은 걸 또 왜 만들겠어. 그 관점에서 봤을 때,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가 가진 두드러진 차별점은 우선 비선형적 플롯일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 제인 에어의 유년기부터 시작해 청년기, 성인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되자마자 제인 에어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성인 아가씨의 이미지로 소개되고, 그로인해 미스터리가 촉발된다. 그녀는 무엇으로부터 쫓기고 있는 것인가. 이 부분을 워낙 고딕 호러풍의 미스터리 스릴러쯤 되는 분위기로 연출 해놨기 때문에,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아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을 것이다. '내가 읽은 원작 소설 속에 이런 내용이 있었나?'하고. 그런데 사실 누군가로부터 쫓긴다기 보다는 그냥 옛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을 뿐. '도피'를 '도주'처럼 보이게 한 플롯 야바위에 일단은 만족한다. 

비선형적 구성을 선택해 얻은 장점은 또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에 지루함이 많이 덜어졌다는 것. 미스터리 아닌 미스터리를 초반부에 심어두고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오가기 까지 하니 고전 중의 고전인 뻔한 이야기 임에도 앞으로 치고나가는 맛이 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 역시 있는 법. 비선형적 구성으로 지루함은 덜었다고 하나, 제인과 로체스터 사이의 멜로 드라마적 감수성이 다소 옅어지는 느낌. 원래 멜로 드라마라는 게 두 인물이 극중에서 함께 보낸 물리적 시간과 또 그 안에 새겨진 감정 곡선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거잖아. 그러니까 제인과 로체스터의 이야기를 좀 진득하게 보고 싶기도 한데 시점이 계속 변화하니 좀 덜 이입되는 측면도 있었음. 

그래도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이 영화에는 미아 바시코브스카가 존재한다는 것. 물론 이 영화에서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제인 에어> 전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었고, 이후에도 <로우리스>나 <스토커> 같은 작품들이 있었지. 그러나 그녀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영화는 <제인 에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원작은 당차다 못해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그리며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었다. 그럼에도 그런 여성주의적인 캐릭터 묘사가 현대에 와서는 다소 전형적으로 여겨지는데, 그 전형성이 미아 바시코브스카의 좋은 연기와 멋진 표정으로 상쇄된다. 사생활을 비롯해 지금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마이클 패스벤더 역시 흥미롭지만, 그럼에도 <제인 에어>가 미아 바시코브스카의 영화로 당연하게 기억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결론. 애초 이 영화를 본 목적이 캐리 후쿠나가라는 감독을 간 보기 위해서였으니. 일단 적어도 <제인 에어>에서 만큼은 꽤 괜찮은 연출력을 선보인 듯 싶다. 이미 수차례 영화화 되었던 고전 문학을 다시금 리메이크한 것치고 아주 새로운 버전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딱 해냈어야 했던 건 다 해낸 튼튼한 영화. 문예 영화로써의 기본기는 잘 다져둔 영화. 그러나 <제인 에어>가 액션 블록버스터는 아니었으므로, 아직까지도 캐리 후쿠나가가 <007 - 노 타임 투 다이>의 연출자로 기용된 건 여전히 아리송하다. 다음 작품인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까지 보면 좀 이해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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