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7 15:27

더 길티, 2018 대여점 (구작)


재판 중인 사건 때문에 긴급 신고 접수원으로 경질된 경찰 아스게르. 업무는 따분하고, 내일 있을 공판은 걱정되고. 그래도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참자-라며 버티고 있던 와중,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목소리만 들어도 신경 쇠약 직전인 것만 같은 한 여자의 구조 신호. 프로토콜에 따라 그녀가 전 남편에게 납치되어 고속도로 어딘가의 밴 안에 붙잡혀있다는 것까지 파악 해낸 아스게르는 통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과몰입해 감정적으로 사건을 대하다 일을 그르치거나, 동료 경찰에게 용의자의 집을 가택 침입하라 요구하는 등 점점 폭주해간다. 


더 스포일러!


특정 공간에서 수화기 너머 상대편과 진행되는 단 한 인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테러 라이브>가 안 떠오를 수 없다. 거의 실시간으로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듯한 리얼 타임 전개, 마냥 응원하기는 어려운 주인공의 이면 등 참 여러가지로 닮았다. 다만 주제와 메시지 측면에서는 조금 다른데, <더 테러 라이브>가 이야기 저변에 깔려있는 계급적 분노에 대한 영화였다면 <더 길티>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결말까지 다 보고난 뒤 영화를 다시 부검해보면, 생각보다 대단히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팩트는 간단했다. 정신병원 수감 이력이 있던 여자가 환각에 빠져 어린 아들을 살해 했고, 이를 목격한 전 남편은 일을 수습하고자 그녀를 차에 태워 정신병원을 향해 운전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와중 그 여자가 반쯤 정신을 놓고 경찰에 전화했던 거고. 이야기 자체는 이토록 심플하다. 그러나 그 귀신같은 플롯 공사에 <더 길티>는 포인트를 둔다.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인과 관계를 바꾸고 특정 정보를 살짝 숨긴채 진행하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 그리고 이 아이디어에 불을 지핀 것은 주인공인 아스게르와 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우리들의 편견과 선입견이다. 

언더 도그마. 봉준호의 <기생충>이 전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나서부터 더 자주 듣게 되는 말. 힘의 차이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오류. 평소 술 마시는 걸 즐겨했고 거기다 폭행 전과에 교도소 복역 이력까지 있었으니, 이건 누가봐도 전 남편이 전처 납치한 상황이지. 하지만 오히려 사건의 본질은 그 반대였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뒤바뀐 상황이었다. 여기서 터져나가는 아스게르와 관객들의 멘탈. 이쯤 되니 더 무서워진다. 그걸 옆에서 지켜본 우리조차 이럴진대, 그 전 남편은 대체 어떤 마음가짐이었을까? 그 양반이야말로 공황 상태 아녔을까? 어린 아들이 집에서 죽은 상황인데, 그 누나 되는 딸은 아빠가 칼을 들고 다녔다 증언할 것이다. 전처의 증언이야 어찌되었든 신빙성 못 얻을 거고, 여기에 자신의 과거 이력까지 탈탈 털리면 배심원과 판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어디를 향할지는 뻔한 거잖아. 씨발, 나였어도 존나 무서웠겠다. 

아주 참신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걸 실현한 구현력이 대단하고, 또 그 컨셉을 뒷받침하는 음향 편집 등이 훌륭하다. 그러나 엄청난 명작이다-라는 세간의 평가에 비해서는 개인적으로 생각보다 좀 심심하게 느껴지더라. 여전히 재밌는 영화인 건 맞는데, 그냥 딱 그 정도랄까? 무엇보다 런닝타임 짧은 게 발군이었다. 이 아이디어로 두 시간 이상 달렸으면 분명 끝나기도 전에 그 힘이 소진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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