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3 15:24

용과 주근깨 공주 극장전 (신작)


<용과 주근깨 공주>는 얼핏, 호소다 마모루의 총합처럼 보인다.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들 속에서 우리가 이미 한 번쯤은 봤던 것들이 <용과 주근깨 공주>에서는 익숙하게 재조립 되기 때문이다. 천변만화하는 구름의 이미지, 덥지만 건조하게 느껴지는 여름, 개와 함께하는 시골살이, 왁자지껄 대가족 혹은 유사가족, 부모의 부재, 수줍은 짝사랑,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완성형 미인 선배 혹은 친구, 0과 1로 이루어진 거대한 디지털 세계, 수인, 여고생 주인공,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힘써 달려나가는 이미지 등등. 장편 기준 가장 오래된 연출작 <디지몬 어드벤처 - 우리들의 워 게임!>부터, 가장 최근작인 <미래의 미라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작품들에서 숱하게 반복되어온 요소들이 <용과 주근깨 공주> 안에 녹아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용과 주근깨 공주>를 두고 호소다 마모루 작가주의의 집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좋은 것들을 모두 욱여넣는다고 해서 그 작품의 질이 무조건적으로 좋아지진 않는다. 그동안의 모든 것들을 넣었지만 제대로 녹아들지 못한채로 뭉툭뭉툭한 만듦새가 된 작품. 이쯤 되면, <용과 주근깨 공주>를 호소다 마모루의 과잉된 총합이라고 부를 수 밖에. 


스포일러 공주!


등장 하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와 주제를 한가지씩 품고 있다. 주인공 소녀 스즈는 엄마의 부재에 대한 트라우마와 더불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갖고 있는 인물이다. 여기에 그녀의 절친한 친구 히로는 극중 존재하는 가상 세계 'U'를 대변하는 인물이며, 시노부는 스즈의 소꿉친구이자 짝사랑 상대다. 혼자 카누 동아리를 만든 카미신은 우정과 열정을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이고, 또 이와 엮이는 루카는 완벽해 보이는 외관 이면에 의외의 허당끼를 가진 미인으로 설명된다. 여기에 스즈와 함께 동네 합창단을 결성한 동네 이모들이 넷이나 추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미 사망해 현재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스즈의 엄마 역시 과거 회상을 통해 트라우마의 근원으로서 보여지며, 홀로 남은 스즈의 아빠 역시 묘사된다. 그리고 왜인지 그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다리 한 쪽을 심하게 다친 스즈의 애완견 또한 등장. 이젠 정말로 끝이라 생각하는가? 천만에 말씀. 지금까지의 리스트는 모두 스즈의 현실에만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이젠 가상 세계 U 안의 인물들도 언급해야지. 심지어는 아직 제목에 명기된 '용'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잖나. 

인물들이 그냥 많은 것과,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인물들이 많은 것은 다르다. <용과 주근깨 공주>의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성격과 전사와 역할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그게 문제가 된다. 이것은 '스즈'와 '벨'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소녀의 성장기인가? 아니면 가상 세계의 익명성과 권력 등을 비판하는 블랙 코미디인가?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그 가상 세계 안의 낭만과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영화인 걸? 그럼 짝사랑 상대를 두고 고민하는 한 여고생의 하이틴 로맨스일까? 완벽해보이는 타인과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슬픈 이야기? 가상 세계의 액션을 토대로 현실 세계의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를 고발하는 고발 드라마이기도 한 것 같은데? 게다가 이를 밝히기 위한 추리 요소도 나오잖아. 그리고 U 안에서 벨로 활동하는 스즈는 온전한 익명성으로 노래에 대한 자신의 꿈을 펼쳐나간다. 벨이 부르는 노래들도 다 좋네, 이거 음악 영화구나? 그런데 용과 벨의 로맨스 아닌 로맨스는 또 <미녀와 야수>에 대한 노골적인 패러디잖아? 어라? 수퍼히어로 컨셉의 악당들도 나오네? 수퍼히어로 액션 장르 영화인 건가? 

놀랍게도 <용과 주근깨 공주>는 그 모든 걸 다 소화하려고 한다. 그럴듯한 주제와 소재 몇개를 취사 선택해 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모든 걸 다 채택해버렸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놀랍도록 중구난방이고 산만하다. 전형적이고 뻔한 선택이었을지언정, 현실 세계의 연애 대상인 시노부가 알고보니 U에서 활동하던 용이었다-라는 전개였다면 이 정도로 헷갈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둘에게 다른 정체를 부여했다. 용은 가정 학대의 피해범으로, 스즈와는 전혀 일면식조차 없던 도쿄 거주 한 14살 소년이다. 그리고 시노부는 그저 시노부일 뿐. 여기서 멜로 드라마에 어깃장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상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 대상과 현실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것. 그 점을 깊게 파고드는 2인 3각 멜로 드라마였다면 차라리 나았으리라. 하지만 영화는 그냥 순진한 척으로 일관한다. 벨이 용을 사랑했던 것 아닌데? 그냥 순수하게 좋은 마음으로 챙겨주고 싶었던 것 뿐인데? 이런 말들로 영화가 변명하는 것만 같다. 

영화는 화려한 시각적 스펙터클을 제공하고, 또 앞서 말했듯 극장을 나선 직후 곧바로 음원 사이트 검색창을 켜게 만드는 삽입곡들로 시청각적 성찬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과한 스펙터클이 다수의 이야기들과 붙어버리니 곧바로 산만해진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타인을 구원한다는 이야기와 전개는 그럴 듯하지만 연출이 구태의연하고 역시나 나이브하다. 영화를 만든 이들이 의도했던 대로라면 그 장면을 보며 눈물 흘렸어야 했는데, 정작 극장 안에서의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감정적으로 전혀 동요되지 않았는데, 영화가 먼저 동요 해버린 탓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점. 스스로의 신상을 자발적으로 드러낸 스즈가 U에서 희망과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이어지는 전개에서, U를 가로지르는 거대 고래의 등에 탄 스즈는 어느새 다시 벨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건 안 되는 거잖아. 스스로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타인과 자신의 꿈을 구해낸다는 상황인데 거기서 본 모습인 스즈가 아니라 벨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체 어떡하냐. 

물론 흥미로운 부분들도 있다. 여러 영화들 속 일반적인 가상 세계에서는 이용자가 자신의 아바타를 선택하거나 커스터마이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용과 주근깨 공주>의 U는 생체 인식 기술을 기반으로 이용자에게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일방적으로 부여한다. 스스로가 선택한 정체성이 아니라, 이것 역시 현실 속 '나'와 마찬가지로 고를 수 없는 정체성인 것이다. 가상 세계를 다루는 영화들이 잘 하지 않는 선택. 이 선택으로 인해 영화는 더 깊은 주제를 탐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 <용과 주근깨 공주>는 이미 다룰 테마가 많아 과식한 상태다. 

<디지몬 어드벤처 - 우리들의 워 게임!>을 필두로 <시간을 달리는 소녀>, <썸머 워즈>, <늑대아이> 등 호소다 마모루는 좋은 작품들을 이미 많이 만들어낸 명장이다. 그러나 최근 <미래의 미라이>부터 이번 <용과 주근깨 공주>까지, 실망스러운 건 실망스러웠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겠지.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그가 각본에 조금의 다이어트라도 시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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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잠본이 2021/10/13 15:40 # 답글

    아직 못봤지만 얘기하신 소재들만 해도 tv시리즈 1분기는 만들겠는데요(...) 욕심이 너무 과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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