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6 11:48

베놈 2 - 렛 데어 비 카니지 극장전 (신작)


정말 신기한 일이다. 한화로 1,000억 원이 훌쩍 넘어가는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그것도 요즘 시기 가장 유행하고 있는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가, 심지어 한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사활을 걸고 만들어진 영화가, 게다가 톰 하디 같은 수퍼 스타가 출연하는 영화가 이토록 B급 감성의 쌈마이한 완성도로 나왔다니. 8,90년대에 많이 나왔던, 극장 개봉 했던 1편과는 다르게 적은 제작비를 책정받아 비디오용 영화로만 만들어진 액션 영화 속편들 중 하나 같다. 

<스파이더맨 2>가 그랬고, <엑스맨 2>가 그랬으며, <다크 나이트>가 그랬듯이. 수퍼히어로 프랜차이즈에서 보통의 2편은 걸작 포지션이지 않나.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이미 주인공의 기원과 능력 등에 대한 설정은 1편에서 다 숙제 끝냈을 테니, 이제 제대로된 아치 에너미만 하나 구해 붙여주고 주제 의식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 <베놈 2> 역시 잘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1편이 훌륭한 영화인 것은 물론 아니였지만, 이번에는 카니지가 나오니까. 카니지는 원작의 팬들이 오래도록 염원해온 스파이더맨과 베놈의 숙적이었다. 공공의 적이었다고. '대학살'이라는 뜻의 이름답게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그 자체를 즐기는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등장. 여기에 캐스팅은 우디 해럴슨. 이 영화에는 희망이 있어보였다. 

하지만 결국 또 시작된 건 에디 브록과 베놈 사이의 브로맨스 아니, 이제는 브로맨스라고 하기 보다 그냥 대놓고 로맨틱 코미디라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에디 브록과 베놈의 기묘한 동거 생활, 그리고 이어지는 별거와 재결합 과정이 영화의 핵심이고 전부다. 자비심 조금 베풀어서, 베놈의 캐릭터가 원작과 딴판이 된 점은 이제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원작 반영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뿐더러 왜 팬들이 그 캐릭터를 사랑해마지 않았는가를 제작진이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 점은 물론 여전히 아쉽다. 허나 이미 1편이 그렇게 나왔는 걸 이제 와서 어떡하겠나. 이제 소니 마블 유니버스의 베놈은 원작의 베놈과 아예 다른 캐릭터가 된 거지. 서운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고로 베놈이 착한 것도, 귀엽게 굴며 에디 브록과 투닥 거리는 것도 넓은 아량으로 참아줄 수 있다. 그래도 카니지라는 역대급 악역을 모셔다두고 대우는 커녕 찬밥 신세 만든 뒤 에디 브록과 베놈의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한 건 분명한 문제지. 

카니지는 베놈이나 전작의 악당 라이엇과 구분될 수 있는 캐릭터였다. 카니지는 숙주와 심비오트 모두 싸이코인 캐릭터다. 에디와 베놈이 목표는 같을지언정 그 수단과 방법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는 관계라면, 캐서디와 카니지는 목표와 수단 모두에서 죽이 잘 맞는 커플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는 공통점이 그들에게는 있다. 하지만 캐서디는 이상한 각색의 결과로 로맨티스트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카니지를 이용하지만, 나중에는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카니지와 불협화음을 낸다. 목적과 수단 모두 같아 그 싱크로가 어마무시할 것 같았던 카니지는 그렇게 베놈이나 라이엇 등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 원작에서 갖고 있던 개성이 모두 휘발된 것. 그리고 씨발, 차라리 우주 정복이나 지구 정복을 한다고 그러지 악당으로서 뭔놈의 계획이 고작 결혼식이냐. 그것도 미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캐릭터인데, 결국 하고자 했던 게 우리 사랑 인정 받고 다 죽여!-라니. 거기서 신부님 갖고 농담 따먹기 하고 있던 것 자체가 문제다. 지금 여기 악당은 조커나 로키가 아니라 카니지라고, 씨바.

액션 블록버스터라고 하기에도 뭐한게, 일단 스펙터클이 현저히 부족하다. 엔딩 크레딧 빼면 겨우 1시간 20여분짜리 런닝타임을 갖고 있는 영화인 건데, 이와중 제대로된 액션이라고 해봤자 클라이막스 베놈 vs 카니지 장면이 다임. 근데 그마저도 어두운 배경에 액체 괴물 찐드기 둘이 치고받는 거라 1편에 이어 잘 보이지도 않고. 가시성은 진짜 최악이다. 물론 중간에 꽤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들도 있다. 성당의 종이 내는 소리와 소리 사이의 짧은 텀 동안 두 심비오트가 잠깐씩 싸우는 전개는 흥미로워 보인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일 뿐. 아이디어가 있으면 뭘해, 그걸 써먹질 않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클라이막스 액션 장면의 배경으로 성당이 나오는 순간 "또?"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그 이후엔 이제 또 성당 첨탑에 있는 종으로 지지고 볶고 하겠구나...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음. 

그냥 나오미 해리스의 슈리크 역할을 아예 빼버리고 베놈 vs 카니지의 단순한 전개로 갔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에디 브록과 캐서디가 대체 무슨 관계인지 잘 나오지 않아 그게 답답하다. 캐서디는 대체 왜 감옥으로 에디를 부른 걸까? 수많은 기자들 중 왜 그를 굳이 콕 찝어서? 그렇담 둘이 무슨 원한 관계가 있든지, 아니면 원래 친구였다거나 일면식이 있었다는 식의 설정이 있었어야지 않냐? 근데 왜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굳이 에디를 부르는 거냐고. 둘의 관계가 먼저 제대로 안 서니까 이후 액션이나 드라마들도 죄다 실패잖아. 왜 자꾸 캐서디가 에디에게 집착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도 이 두 캐릭터는 나은 편이다. 미셸 윌리엄스가 연기한 앤 웨잉은 정말로 최악임. 쿠팡 잇츠나 배달의 민족도 아닌데 그냥 에디 브록에게 베놈 딜리버리 해주는 역할로만 나옴. 에디와의 사이에서 뭔가 제대로된 로맨스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방식으로 각성해 그를 돕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다바리 심부름꾼 역할. 그리고 또 클라이막스 액션 장면에서는 쿠파에게 잡힌 피치 공주 마냥 전형적인 여성 인질 캐릭터로서의 모습도 보여준다. 겨우 이 역할 시키려고 또 미셸 윌리엄스 불러들인 거냐고...

의문이 두 가지 들었다. 왜 앤디 서키스는 이 작품의 연출 제안을 수락한 것일까. 아, 실제 배우와 CG 캐릭터 사이의 연기 케미스트리 연출이 재밌을 것 같아서? 본인이 이런 거 많이 해봤으니까? 그리고 이어드는 또다른 의문. 대체 왜 제작사는 이런 중요한 작품의 연출 자리에 앤디 서키스를 앉힌 것일까? 앤디 서키스 감독으로서는 지금까지 딱 두 편 만들었을 뿐이고, 그 중 한 편은 이런 종류의 액션 블록버스터완 거리가 먼 멜로 드라마였잖나. 심지어 그 두 편 모두 평이 아주 좋았던 것도 아닌데.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쿠키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생각보다는 그냥 무난하게 느껴지던데. 1편 나왔을 때부터 스파이더맨과의 만남은 언젠가 이루어질 필연이겠구나 싶었거든. 그래서 덜 충격적. 그렇다고 그 쿠키 영상 연출을 오지게 잘한 것도 아니라서... 그래도 지금까지 기존 MCU 세계관과는 다른 멀티버스에서의 이야기였다-라는 게 확정적으로 밝혀진 것 자체는 반갑네. 중요한 건 이제부터겠지만. 그런데 그럼 둘이 언제 만나는 건가? 곧바로 이번 <노 웨이 홈>부터? 그렇다면 너무 급한 것 같긴 한데. 뭐 하여튼 이제 MCU로 넘어왔으면 아비 아라드 대신 케빈 파이기가 알아서 잘 하겠지. 

1편을 두고 그런 평을 했던 기억이 난다. 비싼 스포츠카 사서 달구지로 쓰는 기분이라고. 그 평에 이어, 이번 2편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달구지로 쓰던 그 비싼 스포츠카, 결국 도랑에 빠져 폐차합니다-라고.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고작 이 정도 밖에 못 만드는 것도 이젠 능력이라면 능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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