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2 11:29

극장전 (신작)


원작을 굉장히 오래 전에 읽었는데, 그마저도 다 읽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꼬맹이였던 당시의 나에겐 꽤 길고 현학적인 작품처럼 느껴졌을 테지. 아닌 게 아니라,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서 <스타워즈>나 최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정도의 분위기를 기대 했었거든. 그러나 소설은 그런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었다. 아니, 어찌보면 내가 소설에 미치지 못한 것이었으리라. 그랬던 나와는 달리,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 소설을 찬양해 영화로 만들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데이비드 린치도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드니 빌뇌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린치의 버전까지 내가 이야기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 난 그 영화 안 봤거든.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작 소설에도 흥미가 일지 않았었는데 대체 그 작품을 볼 이유가 어린 내게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변명은 내가 이번 <듄>을 관람하고 또 기대한 부분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짚어준다. 텍스트로 매료된 적 없는 <듄>이 내 구미를 당긴 것은 순전히 드니 빌뇌브의 이름 때문이었다는 소리다. 


스포일러 들어갑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내게 양가적인 감상을 끌어낸 작품이었다.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마스터피스처럼 느껴졌던 동시에, 불행히도 대중성은 완전히 쌈싸먹은 작품 같았지.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인 건 맞는데 한편으로는 존나 지루했다는 소리다. 때문에 <듄>도 걱정 했었으나, 다행히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근데 사실 그조차도 내가 과거에 원작을 조금 읽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막말로 원작 소설에 손도 안 댔고 이 세계관의 기초 설정 따위 역시 하나도 모르는 관객들에게는 <듄>이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뺨따구를 후려치는 작품일 것이다. 드니 빌뇌브 특유의 건조하고 넉넉한 연출 때문에 그냥 말하면 확실히 지루한 감이 있거든. 감독 양반은 인터뷰를 통해 지금까지의 작품들 중 가장 대중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고 입 털고 있지만 확실히 대중적으로 넓게 환영받을 수 있는 영화는 여전히 아닌 것이다. 영화가 서둘러 설명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세계관 내의 여러 고유명사들이 난무하는 영화라 기초 설정을 모른다면 스크린 속 인물들이 대체 뭔 이야기를 씨부리고들 있는 건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나마 '스파이스'나 '프레멘' 정도는 간단하게나마 설명해주고 있고, 아트레이데스 가문 vs 하코넨 가문의 대립구도 역시 눈치껏 파악할 수 있으나 '베네 게세리트'의 존재 같은 것들은 그냥 마구 던지기만 해서... 하여튼 영화라는 분명한 시각매체의 틀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안의 내용물은 다분히 문학적이라 거기에서 오는 갭이 확실히 있다. 여러모로 불친절한 각본이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들을 가뿐히 넘긴다면 영화는 황홀한 시각적 만찬을 제공한다. 물론 어떤 이는 그 비주얼에서도 여전히 지루함을 느낄 수 있겠다. 끝없이 펼쳐지는 황량한 사막의 이미지가 대체 뭐가 멋진 것이냐 채근할지도 모른다. 사실 맞다. 이미지의 밀도나 화려함에 있어서는 차라리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더 스펙터클하지. 프레임 곳곳을 세계관이 가진 특유의 이미지들로 밀도 높게 채웠던 <블레이드 러너 2049>와는 완전히 딴판인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린 대상이 다를 뿐 그 화풍과 정성은 여전하다. <듄>의 비주얼적 미학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은 실제 로케이션 촬영을 고수한 제작진의 노력에서 빛난다. 황무지인 동시에 노다지인 사막의 아름다움. 그리고 거기서 물결치는 모래 벌레의 공포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면모. 그 옛날 그리스 신화 속 신전을 방불케 하는 건축 디자인 등등이 <듄>의 아름다움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가 화면 이곳 저곳을 적극적으로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면, <듄>은 그저 관조하고 관망하는 맛에 보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에, 주인공의 선택이 있다. 사실 드니 빌뇌브가 연출해서 있어 보이는 거지, <듄>의 내용 자체는 뻔하고 전형적인 영웅 서사다. 운명에 의해 선택된 고귀한 영웅이, 일련의 사건과 시련을 겪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이야기. 고대의 신화들이 그랬고, 최근의 장르 영화들 역시 다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영화의 황량한 배경과 장르적 공통점 때문에 아무래도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확실히 루크와 <듄>의 폴은 닮은 구석이 많다. 고귀한, 또는 강력한 혈통을 갖고 태어났다는 점. 특정 세력 간의 싸움을 그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았다는 점. 가족을 잃고 모험에 투신한다는 점. 초능력에 준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제국과 황제에 맞선다는 것까지. 이쯤되면 루크와 마찬가지로 폴 역시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뻔한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게 있다. <듄>의 폴은 선택을 내린다. 폴은 예지 능력을 통해 미래를 엿본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이 앞으로 가야할, 가게 될 방향을 잘 알게 된다. 한마디로 운명이 계속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허나 내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는 미래에 친구가 되고 또 자신의 조언자가 될 자미스를 죽인다. 예지되어 있던 미래의 폴은 자미스에게 필시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폴은 스스로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하며, 그리고 현재의 자신에게 닥친 결투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미스를 죽인다. 폴 귓속에서 웅웅대던 신탁은 말했다, 죽음으로써 살게 될 것이라고. 누구라도 혹할만한 말이었으나 폴은 끝내 운명을 꺾는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운명을 받아들이되 그마저도 칼자루를 자신의 손에 쥐려하는 주인공이라 해야할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기존의 다른 영웅 서사 주인공들과 폴의 다른 지점이다. 그리고 물 흘러가듯 순리대로 따라가야할 땐 따라가지만,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는 항상 자신의 판단을 믿고 그에 따라 행하는 폴이 멋졌다. 

계속 말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없진 않다. 마케팅 측면에 있어 화려한 캐스팅을 내세웠지만, 몇몇 배우들은 그 존재감을 제대로 발산할 새도 없이 사그라든다. 아까 말했듯 각본의 불친절함 역시 확실한 문제고.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듄>은 드니 빌뇌브 스스로의 말대로 그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들 중 그나마 가장 대중적인 영화다. 그리고 여기에는 드니 빌뇌브의 야심찬 비전이 있고, 무엇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큰 서사시가 존재한다. 보기 전까지만 해도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여파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막상 보고나니 2부가 더욱 더 궁금해졌다. 이렇게 만들어놓고 속편 제작 안 하면 그건 유죄다. <반지 원정대>만 만들어둔채 <두 개의 탑> 찍을거란 기약 없이 그냥 튀면 어떡하란 소리냐. 그러니까 워너는 빨리 속편 제작 허가 때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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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뒤의 그린 스크린이 매직아이로 보이는 것 같아 좀 많이 깼다. 이후 아마존 장면도 마찬가지고... 굳이 &lt;아라비아의 로렌스&gt;까지 갈 것도 없이 &lt;듄&gt; 선에서 정리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 more

덧글

  • ㅇㅇ 2021/10/24 08:11 # 삭제 답글

    자미스가 조언자 처럼 나오다가 폴에게 결투로 죽어서 좀 의아 했는데 그런 거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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