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4 16:24

온 더 록스, 2020 대여점 (구작)


예고편만으로 기대를 불러일으켰던 영화였는데 애플 TV+의 기습적인 국내 런칭으로 이제서야 보게 된 영화. 아이코닉한 특정 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수다 묶음이라는 점에서는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다만 그 쪽이 사랑 이야기를 곁들인 예술과 문화 전반에 대한 수다였다면 이쪽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시니컬하게 떠들어대는 수다. 

설정이 엄청 좋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주인공과 그녀의 플레이 보이 아버지가 콤비를 이뤄 남편이자 사위인 남자를 몰래 쫓아다닌다는 이야기. 그 자체로 벌써 재밌는 그림인데, 여기에 그 플레이 보이 아버지 역할이 빌 머레이야. 빌 머레이 특유의 무기력하고 시니컬한 동시에 또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체 톤 앤 매너를 그냥 사로잡아 버린다. 한마디로, 빌 머레이의 무한 매력 발산 쇼. 

아침마다 출근 준비로 바쁜 남편의 아침식사를 챙기고, 제멋대로 신이나 날뛰는 두 딸과 전쟁 같은 통학길을 밟으며 이기적으로 수다스러운 동네 친구의 일방적 신문고가 되어준다. 그렇게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삶. 그리고 그렇게 겨우 돌아온 사무실에서, 로라는 작가로서 단 한 글자로 써내지 못한다. 타인을 위해 다 써버려 정작 나 스스로는 사라져버린 하루. 여기에 남편의 외도라는 믿지 못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의심까지 부풀어 오르자 로라는 터져버리기 직전까지 내몰린다. 그리고 이 폭발 직전의 순간에, 그녀를 진정시켜주는 아버지 펠릭스의 등장. 물론 그렇다고해서 펠릭스가 좋은 아버지인 것은 아니다. 그는 로라의 어머니이기도 한 자신의 아내를 밀어낸 전력이 있고, 지금도 딸 앞에서 다른 젊은 여성들을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부모는 부모인 것일까, 펠릭스는 자신의 감과 실력으로 로라를 보좌하며 그녀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딸의 생일선물로 자신의 시계를 선물해 물려준다. 아, 썩 이상적인 부모 자식 사이구나. 

-는 개뿔, 엄밀히 따지면 그 모든 건 전쟁같은 현재의 현실 덕에 잠시 잊혀진 것이었을 뿐. 펠릭스에게 얻은 로라의 트라우마와 상처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것이었다. '남편의 외도'라는 외력에 의해 잠시 해결된 것처럼 보였던 것 뿐이지. 그렇게 부모를 통해 치유되는 것처럼 보였던 로라는 결국 아버지가 줬던 시계를 결국 바람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게 된 남편이 준 시계로 바꾸게 된다. 과거를 잊지 말고 받아들이되, 결국 중요한 건 현재의 나이고 또 현재 내 옆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로라는 아버지에게서 이상적인 독립을 해내게 된다. 그리고 더 좋은 것. 그렇다고 해서 로라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은 것은 또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음'의 사소한 기준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좋다'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겠지만, 그 점에서 적어도 로라는 꽤 '괜찮은' 어른으로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남을 의심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진심어린 사과를 통해 관계를 회복했고, 또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내질러서라도 털어놓은 뒤 그 이후엔 상대를 또 받아들여주었다. 이쯤되면 아버지인 펠릭스가 딸인 로라에게 좀 더 배워야 할 지경. 

아나몰픽 렌즈로 촬영된 것처럼 추측되는 영화의 룩으로 뉴욕을 담아내는 방식, 그리고 라시다 존스와 빌 머레이의 호연까지 한다면 꽤 괜찮은 애플 TV+ 영화. 4K 지원되는 TV가 아직 없어 그게 마냥 아쉬웠을 뿐.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