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9 14:37

재키의 링 극장전 (신작)


할리 베리 주연작이자 그녀의 감독 데뷔작. 그게 주인공 재키의 궤적과 유사해 보인다. 일반적인 휴먼 드라마나 멜로 드라마가 아닌, UFC 선수를 주인공으로 삼은 스포츠 드라마가 데뷔작으로써 할리 베리의 선택을 받은 이유. 재키처럼, 할리 베리도 무언가를 증명해 보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게 배우로서든, 감독으로서든 말이다. 

종목이 복싱 말고 종합격투기로 바뀌었을 뿐, 영화는 왕년의 <록키>가 대중적으로 정립해놓았던 스포츠 영화의 왕도적 구성을 열심히 따른다. 언더독 주인공이 자신의 삶 속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서는 이야기. 훈련의 고단함이나 상대 라이벌 선수와의 갈등은 물론이고 여기에 주인공의 가족 드라마까지 슬그머니 끼어드는 형식. 지난 몇 십년 동안 유사 <록키> 영화들이 골백번도 더 넘게 리플레이 해댄 뻔한 전개와 뻔한 구성이지만, 뻔한 것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그만큼 먹히는 이야기란 소리이기도 하니까. 고로 영화의 뻔한 구성에 그다지 큰 불만은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게 없거나 부족했다고 해서 중대한 감점 요인은 아닌 것. 

사실 감점 요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스포츠 드라마에 슬그머니 끼어든 그 가족 드라마가 아주 재미나지는 않거든. 여성 주인공의 상황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폭력적 면모의 남자친구라든가 갑자기 툭하고 나타난 혼외자식, 소통은 커녕 불화만 조장하는 어머니 캐릭터 등등 확실히 뻔한 건 뻔한 거다. 하지만 <재키의 링>은 이러한 단점들을 그냥 툭툭 털고 일어선다. 그리고 투박하고 어설프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이 담긴 연출을 통해, 멋진 연기를 꿋꿋이 전시해낸다. 맞다, 이 영화에서 라이트 훅 역할을 하는 것은 누가 뭐라해도 연기다. 배우 출신 감독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장점이 <재키의 링>에는 훌륭하게 박제되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감독 할리 베리가 주연 배우 할리 베리를 극한까지 몰고 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것이다. 연기력과 미모는 여전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극한의 육체적 연기를 선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이 영화 속 할리 베리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 고여버린 인물, 그러면서도 마음을 다잡고 트레이닝을 통해 육체적 변화를 꾀하는 인물을 할리 베리는 잘 조각해냈다. 그리고 주연 배우인 할리 베리의 이러한 투지가 신인 감독으로서의 할리 베리에게 큰 힘을 보태주는 것처럼 보인다. 데뷔작이다보니 아직은 세련되지 못한 연출이지만, 그래도 잘하는 것부터 하나씩 해내보자-라고 말하는 듯한 투지. 주연 배우부터 그 투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으니 그 주변 다른 조연 배우들 역시 다 연기 잘하고. 

괜시리 단점 감추겠답시고 날랜 발로 쏘다니는 아웃복서가 아니라, 묵묵한 인파이터 스타일의 데뷔작. 전개상 뻔한 부분과 거친 부분이 많고, 또 인물들 간의 드라마가 깔끔하게 잘 엮이는 느낌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 진진한 투지가 마음에 든다. 평범하지만, 열심히 만든 영화.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내어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