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1 12:52

매트릭스, 1999 대여점 (구작)


품고 있는 사상이나 철학 등의 파고들만한 요소들은 1999년 개봉 이래 거의 20여년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 했으니, 그리고 난 그걸 할 깜냥도 안 되니 그냥 과감히 생략. 그런데 그런 것들 다 논외로 치고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문화적 파급력을 행사한 영화였다. 130년이 넘어가는 영화 역사, 특히 SF와 액션 장르 역사에서 이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 영화도 참 드물 것. 

액션 영화사에 있어 근접 격투의 합과 그걸 담아내는 방식을 새롭게 정립했던 영화가 뒷날의 <본 슈프리머시>였다면, <매트릭스>는 촬영과 조명적 측면 등을 아우르며 그야말로 간지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정립한 영화였다. 마이클 베이처럼 무분별하지 않으며 적재적소 촌철살인으로 삽입된 슬로우 모션, 그리고 연이어 붙은 수십대의 카메라들에서 얻어낸 연속된 쇼트들로 구성한 불릿 타임 연출. 이런 거 보고 있으면 그냥 입이 떡 벌어진다니까. 세월이 흐른 지금 기준에서야 그 신비감이 많이 걷어진 상태지만, 어쨌거나 이건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였다. 알고 보면 이해되는데, 1999년 개봉 당시에 이걸 그냥 봤으면 이해고 나발이고 그딴 거 다 필요 없는 거지. 공중에 멈춘채로 카메라가 360도 돌아가는데 그걸 보고 이해하고 말고 할게 어디있어, 그냥 존나 멋진 거지. 

그리고 주제 측면에 있어서도, 워쇼스키 당시엔 형제가 대단한 철학적 발견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초반부 이스터에그로 언급되듯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이미 존재했음을 넘어 너무 유명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짜 세상인가'라는 것도 무척이나 오래된 질문이었지 않은가. 인간들이 기계에 의해 지배당하는 컨셉 또한 개봉당시의 대중영화판에서 이미 15년 전이었던 <터미네이터>가 크게 홈런 날렸었고. 그러나 워쇼스키 형제는 그 익숙하고 진부한 것들을 모아 배열하고, 거기에 기깔나는 아이디어와 그걸 뒷받침 하는 기술력이란 포장지를 활용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질만한 영화로 재탄생 시켜냈다. 애초 감독이란 직책이 종합예술매체인 영화를 구성하는 직책 아닌가. 그 관점에서, 워쇼스키 형제는 장편영화 두 편만에 이미 마스터가 되었다. 물론 그 이후 어떤 길을 걸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굳이 아쉬운 걸 꼽자면, 그건 바로 액션의 타격감. 투박하게 쥐어패는 액션 히어로가 아니라, 네오는 여러 무술들을 활용해 상대를 부드럽게 제압하는 액션 히어로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액션이 발차기 까딱까딱하는 걸로만 보이면 그건 좀 문제잖아. 

사족으로, 내가 지금까지 봤던 디스토피아 영화들 중 가장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터미네이터>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정신적으로 더 아득해진다는 점에서 더 암울함. 좆망한 지구 모습도 존나 안타깝고. 

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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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잠본이 2021/12/22 12:17 # 답글

    제대로 본 적은 없는데 영향력은 여기저기서 실감할 정도죠...
  • CINEKOON 2021/12/29 12:38 #

    이제와서는 너무 늦어버린 원조집 탐방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래도 한 번 제대로 관람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거국적으로다가...
  • SAGA 2021/12/26 11:09 # 답글

    매트릭스는 액션의 간지화에 한몫 단단히 했더랬죠...
  • CINEKOON 2021/12/29 12:39 #

    터프하기만 하던 당시의 주류 액션 영화들과는 달리 특유의 우아함이 돋보인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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