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는 단 한 편만으로 신드롬을 만든 영화였다. <007>을 늙어보이게 하고, <본> 시리즈를 고루해 보이게 하는 젊은 감각의 액션 첩보 활극이었지. 하지만 <007>과 <본> 시리즈가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던 것처럼, <킹스맨> 시리즈도 2편에 이르러 소포모어 징크스에 제대로 맞아버렸다. 그리고,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시리즈의 구원 투수로 등장한 세번째 영화이자 프리퀄. 여기까지 보고나니, 이제 이 시리즈를 한 줄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 역사상, 최단기 퇴물'이었노라고.
스포일러 에이전트!
최근 <매트릭스 - 리저렉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라나 워쇼스키는 <매트릭스> 시리즈가 아니라 좀비 영화를 연출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이번에도 비슷하다. 단 세 편만에, 매튜 본은 킹스맨 에이전시와 그 소속 요원들에 대한 흥미를 모조리 잃은 것만 같다. 이번에는 그냥 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 찍고 싶었던 것 같음. <킹스맨> 시리즈의 후속편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만의 <1917>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프랜차이즈 영화로써의 미덕이 전혀 없는 영화다. <킹스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 확고부동한 영국의 이미지? 젊은 청년의 신데렐라 스토리? 아, 콜린 퍼스의 중년미를 이길 수는 없다고? 아니, 그런 세부적인 것들 말고. 그냥 그 영화의 태도가 어땠냐고. 그 영화는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각국 정상들의 대갈통을 폭죽 터뜨리듯 해버린 영화였지 않은가. 그 특유의 과감한 용기, 시대를 잘 읽어들인 병맛 정신. 이게 <킹스맨>의 소울 아니냐? 하지만 이번 영화에는 그런 게 없다. 병맛이라고 할 만한 건 그나마 리스 이판이 연기한 라스푸틴의 정신나간 액션 안무 정도 뿐. 나머지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전형적인 제 1차 세계대전 묘사다. 따로 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 만들겠다면 할 말 없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킹스맨' 타이틀 붙이고 만든 영화에서 이러면 곤란한 거지.
내내 그 국적을 강조해왔던 시리즈라 아무래도 주인공이 영국의 입장을 대변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영국의 화신으로 나오는 주인공 듀크 옥스퍼드가 제 1차 세계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평화주의자 행세하는 게 너무 눈꼴시렵다. 파병기지 나가서 포로들 대우를 걱정하는 것부터가 넌센스. 아니지, 일단 그걸 떠나서 평화주의에 비폭력주의까지 운운하는 게 너무 어이가 없다. <킹스맨>은 애초부터 길티 플레저 역할을 해주는 시리즈 아냐? 폭력을 옹호하는 걸 넘어 즐길 수 있게끔 과감히 몰아붙이는 점이 이 시리즈의 미덕이었는데, 갑자기 주인공이 평화주의자라고 대뜸 나옴. 그러면서 중반 이후부터는 또 겁나 싸워대고... 결국에 '평화를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다 죽일 거야'라는 마인드로 갈 건데 왜 그리 폼 잡았냐고요.
악당의 존재감과 캐스팅에 마저 악수를 뒀다. 첫 등장부터 수상쩍었던 모튼. 일개 그냥 지나가는 캐릭터인 것 치고는 캐스팅이 매튜 구드라 의심하는 게 당연. 그래도 생각했었다, '에이, 설마 매튜 구드를 캐스팅해두고 알고보니 악역이었다는 반전이라면 너무 뻔하잖아. 오히려 역반전을 노린 거겠지' 하지만 결국 그가 악당이었음. ......최근 들어 본 영화들 중 이토록 김빠지는 악당의 정체는 이 영화가 탑인 것 같다. 더불어 매튜 구드 나쁜 배우는 아니지만 이전 시리즈 악당들에 비해서는 그 카리스마가 너무 처량하잖아...
등신 같지만 멋있는 시리즈였는데 그냥 등신이 됐다. <골든 서클>의 처량한 완성도 때문에 블루레이도 안 산 상태인데 이쯤 되면 그냥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이거 블루레이 하나만으로 만족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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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본이 2021/12/30 13:34 #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