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수를 화끈한 쾌감의 근거로 삼는 영화들은 많았다. 복수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대부분이 나쁜, 또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기에 몸뚱아리가 마구 토막나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걸 즐기게끔 만드는 감독들이 많았지. 타란티노라든가... 반면 <프라미싱 영 우먼>의 복수는 화끈함이나 쾌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때론 지지부진하게 표현된다. 그래서 최후의 승자로 혼자 우뚝 남는 결말이 아닌, 복수 계획의 마지막 퍼즐로서 스스로가 산화하는 영화의 지금 결말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이런 복수도 있다.
스포일러 영 우먼!
영화는 노골적인 여성 학대 서사를 띈다. 복수 계획에 불을 지핀 피해자는 여성이고, 그녀는 다수의 남성들에 의해 술에 취한 상태로 윤간 당했던 것으로 간접 묘사된다. 여기에 그런 그녀를 믿어주지 않은 주위 사람들과 사법 시스템은 덤. 이에 피해자 니나의 가장 친한 소꿉친구였던 주인공 캐시가 복수에 나서지. 여성을 유린한 남성들과 여성 부역자들, 그들에 대한 여성의 복수. 아, 단지 그것만으로 여성 학대 서사를 들먹이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특히 서구권에서 여성들이 많이 당하는 캣 콜링, 영원히 남는 비디오 등등의 요소들까지 끌어들여 그 서사를 완성 시킨다. 어느 모로 보나 확실히 총구를 겨눈 영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영화가 모든 남성들을 성 범죄자 또는 그 부역자 정도로 일반화해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투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프라미싱 영 우먼>은 '기억하고 후회하는 자들'에 한해서는 면죄부를 발급 해준다. 그마저도 그 성 범죄에 직접 가담한 사람까진 아니었기에 허락 되었던 면죄부였겠지만, 어쨌거나 과거 그 가해자를 변호 했던 변호사는 캐시에 게 후회와 반성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뒤늦게나마 용서 받는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후회의 선결 조건은 기억이다. 피해자의 이름과 사정을 기억하는 것. 기억함으로써, 그렇게 변호사는 자신의 과오를 용서받는다.
확실한 쾌감을 남기기는 할테지만, 어쨌거나 또다른 가해자로 남을 수 밖에 없는 복수란 테마. 하지만 캐시는 끝까지 가해자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날지언정, 내가 죽을지언정 가해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결심. 지지부진해서 숭고한 그 복수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주인공이 죽고 난 이후에도 복수의 계획이 지속되는 복수 영화. 근데 그것에서 조차 이상한 쾌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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