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치병에 걸려 죽을 날을 미리 받아놓은 남자가 남겨질 아내와 아들을 위해 스스로를 복제한다. 남편 없는 삶이 아내에게, 아빠 없는 삶이 아들에게 어떤 것일지를 알기에, 남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을 그들 곁에 두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려한다. 육신과 기억 뿐만 아니라, 끝내는 내 직업과 관계와 자리까지 넘겨 받게 될 그 복제인간. 남자는 질투에 빠진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든 복제인간이고 그 생김새 역시 똑같건만, 그가 갖게 될 모든 것들이 다 질투스럽다. 내가 나를 질투하는 기묘한 상황 속으로, 그렇게 남자는 빠져든다.
<백조의 노래>는 우리네 평범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설파하는 영화고, 그와중 스스로를 미워하는 자기 혐오와 더불어 결국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해줄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영화다. 우리 누구나 그래본 적 있을 것이다. 내가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을 때, 능력이 너무 부족해서 그 한계를 절감할 때 등등. 우리 모두는 우리 스스로를 미워해보았다. 하지만 삶이란 게 그렇다. 살다보면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무심하고 냉정하다. 그러니 최소한 나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좀 사랑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맞는 거잖아.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세상 그 누구가 그런 나를 사랑하겠는가.
그래서 캐머런 터너는 자신의 얼굴을 한 잭과 갈등한다. 네가 갖게 될 그 가족, 그거 내 가족이잖아. 너가 살게 될 그 집, 그거 내 집이었어야 하잖아. 어째 쓰다보니 점점 JYP스러워지기는 한데, 하여튼 요점은 그거다. 존나 질투난다는 거. 심지어 내 얼굴을 하고 있는 '나'인데도 말야. 하지만 끝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역시 결국 그 둘이다. 아니, 하나라고 해야할까. 측은지심은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게 과해지면 합리화의 명수가 되겠지만, 여기서 굳이 거기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고.
그러다보니 잭이 캐머런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 그게 참 감동이었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사랑한다 말해줘-는 곧 캐머런을 보란 뜻이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허하는 아주 조금의 인정. 거기서 잭이 참 어른스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잭이 어른스럽다는 것은 캐머런 역시 어른스럽다는 것이다. 두 어른은 그렇게 서로와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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