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6 17:47

하우스 오브 구찌 극장전 (신작)


욕망을 쫓아 흥하다 결국엔 망하는 이야기. 영화는 전형적인 욕흥좆망 스토리고, 구찌라는 유명 브랜드 내부가 배경일 뿐 왕위와 권력을 두고 다투는 궁중 암투극과도 비슷하다. 다만 포인트는 그것이다. 이 영화가 만약 진짜로 궁중 암투극이었다면 그 주인공이 왕이나 왕자라기 보다는 후궁이었을 거라는 점. 그 피와 성씨가 중요한 가족 경영 시스템 안에서, 손에 아무 것도 쥐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군림한다는 거. 


스포일러 오브 구찌!


앞날이 다 보이는 전형적 이야기인데, 리들리 스콧은 생각보다 그를 덜 자극적으로 묘사해냈다. 그게 잘 보이는 곳이 바로 파트리치아와 마우리치오가 처음 만난 파티 장면. 파트리치아는 춤 추던 도중 목을 축이러 바에 간다. 바텐더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채 고개를 숙이고 술을 주문하는 그녀. 하지만 바텐더는 바텐더가 아니었고 그저 잠깐 거기 서 있었던 사람일 뿐이었다. 그녀가 이름을 묻자, '마우리치오 구찌'라고 대답하는 남자. 그녀는 그 남자의 이름 뒤에 붙은 성씨를 듣고서야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본다. 그렇다, 그녀는 '마우리치오'라는 이름보다 '구찌'라는 성씨에 반응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이라면, 그 순간 파트리치아의 시선을 클로즈업으로 담아 강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게 정석이겠지.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쇼트의 사이즈는 변하지 않는다. 그저 그 안에서의 인물들 시선만 변화할 뿐. 아, 이는 어쩌면 마우리치오에 대한 파트리치아의 마음을 관객들이 조금이나마 더 아리송하게 느끼게끔 하려는 리들리 스콧의 술수였을까. 

그러나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치오' 보다 '구찌'를 더 사랑한 것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을 부채질하는 장면들이 좀 더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첫 등장 장면. 파트리치아는 넓은 주차장을 패션쇼의 런웨이 삼아 걸으며, 그리고 자신을 향한 남성 인부들의 캣콜링을 불편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받아들이고 즐기며 출근길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애초부터 그녀는 남들의 그러한 시선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중반부 뉴욕 구찌 매장 앞에서의 모멘트. 시삼촌인 알도 구찌의 주위에만 몰려든 기자들. 이에 대비되는 파트리치아 주위의 황량함. 파트리치아는 결혼을 통해 '구찌'라는 성씨를 얻었음에도, 거기에만 만족하지 못한다. 아, 아직 갖지 못한 것들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들 중 가장 무서운 종류는, 욕망과 행동력을 둘 다 갖춘 사람이다. 그리고 파트리치아가 바로 그런 부류였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을 하고, 시삼촌과 손위시숙까지 도려낸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건, 남편의 청부 살인을 의뢰하는 결말. 씨바 듣기만 해도 존나 무섭네. 

앞서 말했듯, 영화가 덜 자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반대로 그를 기대한 관객들 역시 존재하겠지만, 나로서는 이 영화마저 그런 태도를 취했다면 너무 뻔할 것 같았거든. 여기에 여든을 훌쩍 넘기고도 그 중반의 나이를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노장 리들리 스콧의 꽉 짜인 연출력 역시 나름대로 좋다. 아닌 게 아니라, 80대인데도 정말로 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촬영과 편집, 음악적 측면에서 여타의 젊은 감독들 못지 않게 힙한 느낌. 그리고 그와 발 맞춰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 역시 어마어마하게 훌륭함. 레이디 가가는 단 두 작품 만에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냈고, 아담 드라이버는 연기 인생 중 최고의 날들을 여전히 이어나가는 중이며, 자레드 레토의 징징대는 연기 또한 무척이나 재미있다. 알 파치노와 제레미 아이언스의 호랑이 같은 면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허나, 여전히 영화가 너무 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리들리 스콧은 피터 잭슨이랑 같이 손 잡고 런닝타임 다이어트 클럽 좀 찾아가 볼 필요가 있다. 한 남녀 커플의 만남부터 사랑, 이별까지의 서사시를 다룬다는 점에서 어느정도의 긴 런닝타임을 취한 것 자체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긴데 밀도까지 떨어지면 그건 문제지. 그나마 최근작 <라스트 듀얼>은 챕터 구성을 띄었고 그 목표 역시 명백 했기에 긴 런닝타임이 약간 중화되는 감 있었다. 반면 <하우스 오브 구찌>는 그런 게 없다. 핵심 미스테리도 없고, 정작 이 영화의 제작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싶은 청부 살인 사건도 그 끝자락이 되어서야 농담처럼 잠깐 소개됨. 하여튼 간에 전반적으로 영화적 리듬이 많이 엉켜있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샤넬도 그렇고, 디올도 그렇고 다 가족 기업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구찌처럼. 그러다보니, 영화가 결말에 던져주는 그 자막 한 줄이 너무 씁쓸했다. '현재 구찌 내에 구찌 가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라는 한 줄. 인생사 진짜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다. 알도라고 알았겠나, 예뻐했던 조카 며느리한테 뒷통수 맞고 구찌 브랜드 그대로 빼앗길 줄. 마우리치오 역시 알았겠나, 운명을 가장해 다가온 여자에게 자신의 목숨까지 모조리 빼앗길 줄. 인생 진짜 존나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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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잠본이 2022/01/17 12:04 # 답글

    러닝타임 다이어트 클럽ㅋㅋㅋㅋㅋㅋ 감독이나 제작자 입장에선 어찌보면 그만큼 다이어트를 안해도 아쉬울게 없다는 반증일수도 있겠군요. (점점 길어지는 MCU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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