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위쳐> 보다 더 하다. <위쳐>는 원작 소설까진 못 읽어봤지만, 그래도 CD 프로젝트 레드가 만든 게임의 3편은 재밌게 했던 경험이 있었거든. 그 상황에 비하면 <아케인>의 처지는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원작이 되는 게임, 내 나이대의 동성 친구들은 누구나 다 해봤던데. 근데 나는 진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걸랑. 고로 세계관이나 인물들 설정도 모르고,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역시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케인>이 증명 해낸 것도 있다. 단순하고 어찌보면 당연한 명제이지만, <위쳐> 드라마를 포함해 너무나도 많은 리메이크작들이 간과하는 바로 그것. 원작에 기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작품 자체가 가진 순수 재미라는 진리. <위쳐>가 순수 재미 0%에 수렴하는 시리즈였다면, <아케인>은 못해도 90% 이상의 순수 재미를 보장 해낸다. 그러다보니, 원작 게임이고 나발이고 알게 뭐람. 원작을 안 봤어도 상관 없어, 존나 재밌으니까.
내가 평소 좋아해마지 않는 이야기 설정이란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돌아선 관계'들에 흥미를 느껴왔다. 그 겉껍질이 액션이든, SF든, 멜로든 간에. 그 누구보다 가깝고 친밀한 관계였지만, 모종의 사건과 오해들로 인해 끝끝내 서로에게서 돌아서버린 사람들. 아나킨과 오비완이 그랬고, 스티브와 토니가 그랬으며, <소셜 네트워크>의 마크와 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에 끌린다. 그리고 <아케인>은 나의 그런 취향을 정확히 조준해냈다. 어찌보면 굉장히 뻔한 설정에 고루한 전개지만, 그럼에도 시즌 초반 3화동안에 바이와 파우더 자매의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켜냄으로써 그 전형성을 어느 정도 뚫어냈다고 볼 수도 있을 거다.
서로를 형제 또는 남매 또는 자매로 여기던 둘이 기어코 갈라서게 되는 이유들은 대개가 다 비슷하다. 첫번째는 가치관의 차이요, 이어지는 두번째는 보통 순간의 감정으로 인한 오해 때문. 가치관 때문에 갈라지게 된 건 아나킨 & 오비완, 스티브 & 토니가 그랬다. <아케인>의 바이와 파우더는 두번째 경우다. 헛되이 치른 희생, 그리고 도우려다 벌어진 참사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결국 바이와 파우더는 갈라지게 된다. 이후 둘은 각각 필트오버와 자운을 대표하고 수호하는 인물들로 변모하는데, 사실 가치관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잖아. 바이야 상황상 동생을 구하고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 필트오버 편에 잠시나마 선 것이지, 사실은 그녀 역시 자운 출신 현실주의자니까. 파우더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자운의 가치관이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그 모든 사단을 벌인 건 아니니. 그녀가 원했던 건 그저 기댈 곳이었을 뿐. 자신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자신 역시 쓸모 있다는. 자신의 가치 증명과 또 그에 상응하는 애정을 갈구 했을 뿐인 거다.
앞서 말했듯 그 이야기와 전개의 전형성까지 어쩔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바이와 파우더 각 캐릭터, 그리고 그 관계가 워낙 매력있게 잘 뽑혀 보는내내 감정적인 동요가 생긴다. <시스의 복수>와 <시빌 워>가 그랬듯이,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보통 보는내내 '아, 제발 서로에게 그러지 마'라는 생각을 관객들이 끊임없이 해야 성공인데 이 부분에서 <아케인>은 유효한 적시타를 이뤄냄. 물론 그 외의 캐릭터들 역시 굉장히 잘 조형되어 있고. 끝판왕 악역이지만 살리에르 콤플렉스로 징크스와 관계 맺는 실코의 입체감, 본편의 주요 전개와 다소 동떨어져 있는 듯 싶음에도 부여받은 각자의 이야기에서 성실히 달려나가는 제이스 및 빅토르 등.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많음에도 불필요하다거나 낭비 되었다는 느낌이 없다. 감독의 용병술이 탁월한 축구 팀 보는 느낌이랄까.
<아케인>의 또다른 강점은 스타일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로써 갖는 탁월한 스타일. 마치 바이와 징크스처럼, <아케인>은 오소독스와 사우스포를 오가며 그 강점을 드러낸다. 전형적이지만 탄탄한 이야기 구조, 그리고 거기에 품어둔 주제와 메시지. 이는 오소독스 바이처럼 단단하다. 반면, 액션과 그를 담아내는 작화 및 표현은 사우스포 징크스 마냥 변주 가득하고 날래다. 징크스의 조현병 증상을 표현하는 부분이라든가, 점화단의 공중 액션을 묘사하는 부분 등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서만 가능한 화려함이다.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이후 꽤 오랜만에 체감하는 애니메이션의 마력. 모든 게 가능한 매체이니 그 연출의 묘가 더 중요했을 텐데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수준.
원래는 볼 생각이 단 1%도 없던 시리즈였으나, 시작한지 반나절 만에 시즌 피날레까지 쭉 달렸다. 시즌 2 얼른 나왔으면 좋겠고, 게임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바이와 징크스가 그나마의 좋은 결말을 서로에게 얻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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