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3 18:06

적벽대전 - 거대한 전쟁의 시작, 2008 대여점 (구작)


명절엔 역시 삼국지 아니겠는가. 

삼국지는 애초부터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인지라, 드라마 포맷이라면 모를까 황건적의 난 시기부터 오장원에 지는 별 이후까지 영화에 다 담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러려면 대체 몇 편이 나와야하는 거야...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는 어느 시점, 어떤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잡아 삼느냐가 영화적으로는 가장 중요할 것이다. 바로 그 부분에서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연작은 시작부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나아간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삼국지의 3대 대전들 중 가장 인기 좋은 적벽대전 영화화인데 이게 어찌 흥미롭지 않을쏘냐. 

이미 시작부터 유리한 상황에서, 영화는 서사 삼분지계를 시도한다. 아마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유비, 관우, 장비의 이름은 알 것이다. 그러나 <적벽대전>은 그 셋에 조자룡까지 섞어 그들을 적절한 조연으로 기용해 미드필더로 쓰되, 핵심 스트라이커 역할은 주유와 제갈량을 위해 남겨두었다. 근데 여기까지만 했어도 됐을 판국에, 오우삼은 손권 캐릭터로 수비 진영까지 촘촘히 신경 썼다. 물론 원작이 되는 이야기에서도 주유와 손권은 핵심 인물이지. 하지만 영화로 옮겨오는 와중 손권까지 챙겨줄 필요는 굳이 없었을 것 같거든. 그냥 허수아비처럼 멀뚱히 서 있기만한 캐릭터로 빚어도 큰 무리는 딱히 없었을 것 같은데, 오우삼은 손권 캐릭터까지 알뜰히 챙겨줬다. 사실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굳이 하는 거냐면... 나는 극중 손권 캐릭터에 가장 이입했걸랑...

성군이라 칭송받는 아버지와 형의 그늘에 갇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는 사람. 남들의 그림자에 갇혀 자신의 뜻을 펼쳐보기는 커녕 지레 겁부터 먹는 사람. 적벽대전이라는 큰 전투에서 간지 담당은 결국 주유와 제갈량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우삼과 장첸이 빚어낸 뻔하지만 세심한 캐릭터 손권이 내게는 더 멋져 보였다. 주유야 패배해봤자 자기 아내랑 자기 목숨 정도 잃는 거지. 근데 손권은 그 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 심지어는 자기 자존심과 사후 평가까지도 다 잃는 상황이었던 거잖아. 그와중 제갈량은 왠지 패배 후에도 홀홀홀~ 부채질 하며 여유로운 척 도망쳤을 것 같고.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인데, 양조위의 출연작들 중 양조위가 가장 양조위처럼 안 보이는 영화이기도 한 것 같다. 물론 특유의 그 멜로 감성과 흔들리는 눈빛은 누가 뭐라해도 양조위 본인일진대, 주유 역할하며 뿜어내는 카리스마가 정말 이상하게도 평소의 그 인상과 좀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음. 근데 그럼에도 양조위는 양조위다. 그냥 보는내내 기품이 흘러 넘쳐서 그거 떠받치느라 내가 다 혼났다. 

조금 딴 얘기인데, 삼국지 실사 영화들 중 매번 웃기게 느껴지는 캐릭터가 나에겐 바로 관우 같다. 나만의 느낌이겠지만 삼국지 최고의 개그캐 느낌. 책으로 읽을 때는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인데, 막상 실사화된 버전으로 보고 있으면 그 진지함이 너무 웃김. 몸이 토막나고 피가 철철 뿜어져 나오는 전쟁터 한 복판에서 긴 수염 휘날리며 홀로 고고한 표정 짓고 있는 게 존나 웃긴다. 엄근진한 표정으로 중국 무협 영화 특유의 부앙부앙한 몸짓 펼치는 게... 그 사이에서 갭 모에 발생. 여기서도 서퍼 마냥 방패 진영 타는 거 개웃기던데.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는데, 결말 이후 같이 본 사람들이 꽤 허탈해하더라. 제목은 '적벽대전'인데 정작 그 전투는 안 나왔다며. 근데 난 클라이막스 전투의 퀄리티가 꽤 괜찮았기 때문에 그냥저냥 만족한 편이었음. 그 때나 지금이나. 아니면 그 때 당시 이게 연작 구성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었기에 만족할 수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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