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보는내내 지겨워서 혼났다.
스포일러가 있지만, 사실 스포일러에 별 의미가 없는 작품.
확고한 컨셉은 좋다 이거다. 분열된채 점차 쪼개져가고 있는 현실 정세 안에서, 각대륙 각국의 대표 첩보원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 난국을 타개해가는 이야기를 통해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거잖아. 메시지? 조금 유치하지만 합격. 여기에 에스피오나지 장르 역사 내에서 아직까진 메인이라 할 수 없었던 여성 첩보원들의 연합. PC나 페미니즘을 원론적으로 적당히 반영해 재미에 큰 지장만 안 주게 만들면 이것도 오케이. 거기다 현 시점 가장 잘나가는 여성 배우들을 기용한 것, 이건 그냥 인정이지. 제시카 차스테인은 멋지고, 루피타 뇽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격정을 보여주며, 다이앤 크루거는 오랜만에 봐도 좋은 데다가, 페넬로페 크루즈는 그냥 존예. 다만 판빙빙은 영 적응이 안 된다는 게 함정... 중국에 딱히 악감정 있다거나 그래서 그런 게 아니다. 내용상 중국측 요원이 하나 정도 나와주는 거 좋다고 생각해. 영화외적으로도 중국 자본이 들어간 영화이니 그럴 수 있다고 보고. 근데 혼자 연기를 너무 못하잖아... 뭐 어쨌든.
이렇게 제작 의도는 하나하나 다 주옥같고 이해가 간다. 하지만 포부만 당찼을 뿐, 영화는 영화 구실을 제대로 못 해낸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전개에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듯 시작하자마자 반전 찍고 결말에 에필로그까지 다 유추할 수 있게 되는 부실한 내용. 거기까지면 그래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그 허접한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는 묘사에도 무리수를 둔다. 세바스찬 스탠이 연기한 닉은 첫 등장부터 '알고보니 악당'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인물이 갑자기 주인공 메이스와 급 러브 라인을 결성함. 그 이유야 뻔하지... 그래야 중반부에 갑자기 등장한 그를 보고 메이스가 멘탈 나가니까... 그래야 후반부 메이스의 액션에 격한 감정이 부여되니까... 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뻔하고 뻔뻔한 거 아니냐고.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면서 왜 갑자기 둘이 키스하고 섹스하고 반지까지 교환하는 건데? 신분 위장을 위해 나눠 낀 반지이긴 해도 그 의미 자체가 이미 커플 확정을 위한 소품인 거잖아. 이런 씨바...
각 주인공들의 국가가 사건에 끼어든 구성 역시도 지극히 억지스럽다. 애시당초 미국은 그 자신이 세계 경찰이란 허상을 갖고 있으리 그러려니 하고, 영국은 그런 미국을 따라 연합한다 쳐주겠다. 독일은 갑자기 왜 끼어드는 건데? 맥거핀에 불과한 그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최종 병기의 제작자는 콜롬비아 갱스터고, 그걸 탈취한 사람 역시 콜롬비아 요원이며, 그게 거래 되려던 공간은 프랑스였잖아. 근데 프랑스도 아니고 그 옆나라 독일은 왜 끼어든다고요...? 그리고 페넬로페 크루즈가 연기한 콜롬비아측 심리상담사는 어쩌다 끼어든 것이니 이 또한 그렇다치는데, 중국은 왜 등장 하는 거죠? 물론 단순 배경으로 쓰일 수도 있고, 단순 악당으로 묘사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걸 넘어서 중국 요원이 미국 요원과 붙어먹는 전개잖아요... 이념을 넘어선 화합을 그리고 싶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걸 말이 되게 포장 하셨어야지. 도대체 왜 린미셩이 주인공 파티를 도와줬던 건지 의문. 차라리 여성 첩보원으로서 동질감을 느꼈다는 묘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또 몰라...
액션도 더럽게 재미없다. 총격전부터 추격전까지, 그냥 못 찍었다. 흥분이 1도 안 됨. 그나마 격투 장면은 배우와 스턴트 배우들의 노력이 보여 조금 나은데, 문제는 이걸 하나같이 다 셰이키 캠으로 찍어놔서 구분이 잘 안 된다는 거. 여기에 의외성을 부여 하려는 별다른 노력조차 안 했다. 미국 요원은 우당탕탕 돌격대장이고 영국 요원은 또 말도 안 되는 기술로 말도 안 되는 해킹 실력을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해커 역할. 폭발물 전문이라고 붙은 독일 요원의 전공은 딱 한 차례 잠깐 묘사될 뿐이며 중국 요원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봉술 시전. 그나마 판빙빙은 봉이라도 돌리지, 페넬로페 크루즈는 역할 자체가 비요원 캐릭터라서 마지막에 총 한 발 쏜 거 빼면 이렇다할 액션 활약이 전무하다.
이토록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서 얻은 가르침이 딱 한 가지 있다면, 역시 '멜로 못지 않게 액션에서도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뿐. 그저 세계 평화를 위한답시고 싸우는 주인공들 보면서는 별 재미가 없었는데, 루피타 뇽오의 캐릭터가 남자친구를 잃은 이후 시점부터는 관객 입장에서도 복수감에 불타게 되어 그나마 아주 조금 재미있었다. 그 정도 교훈 외에는 이 영화에 딱히 남는 게 없는 것 같네...
<엑스맨 - 다크 피닉스> 때는 신인이라 그냥 어색한 거 아니었을까 싶었는데 <355>까지 보고 나니 명확해졌다. 사이먼 킨버그는 영화를 잘 못 찍는다는 사실이. 근데 이 사람 차기작 나오면 또 보고 싶음. 이번엔 얼마나 나아졌을까 or 이번엔 얼마나 더 망가졌을까- 그거 보느라. 이 정도면 내가 생각해도 악취미 맞는 것 같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