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3 20:29

색, 계, 2007 대여점 (구작)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존 드라이든은 말했다. "사랑의 고통은 다른 어떠한 즐거움 보다도 달콤하다." 정확히 어떤 문맥 안에서 어떤 의도로 이 문구가 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사랑의 과정엔 고통이 당연히 수반되어 있음을 알리는 경구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고통. 우리는 고통을 통해 사랑에 이르고, 반대로 사랑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랑에 있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그 고통을 <색, 계>는 그려낸다. 아니, 어찌보면 더하다. <색, 계>는 파멸로 가는 사랑과 사랑이라는 파멸, 그 둘 모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홍콩, 친일파라는 표현조차 후하게 느껴지는 민족반역자 이. 그런 이를 암살하기 위해 젊은 대학생들이 의기투합한다. 그 포부와 애국심 만큼은 인정할만 하지만, 그럼에도 한낱 오합지졸 대학생들일 뿐인데 그런 그들이 어찌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이를 암살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승산없는 전면전이나 어색한 잠입 작전이 아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도록 그 효과를 발휘해온 미인계다. 그렇게 그들 사이 유일한 여성 단원이었던 두 명 중 왕치아즈가 그들 미인계의 무기로 발탁된다. 마침 연극 배우로서 연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그녀.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생애를 조작하고, 외모를 꾸미며, 심지어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섹스까지 배워낸다. 그런 준비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이와 대면하게 된 왕치아즈. 

이안은 어느새 쌓인 필모그래피를 통해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적 변화를 탁월한 앵글로 담아내는데에 자신이 능하다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증명해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종종 집중해 담아낸 것은 다름아닌 욕망이었다. '욕망'. 단어가 주는 욕심쟁이 같은 어감 때문에 부정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이안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사는 삶 안에 깃든 슬픔과 고통, 그리고 역설까지도 영화적으로 표현해내곤 했다. 심지어 그가 연출한 최초이자 유일한 수퍼히어로 영화 <헐크>마저도 그를 담아내고 있지 않은가. 아들에게 부여된 태생적인 힘과 존재론적 자기혐오. 아버지는 아들의 그것을 욕망하다 결국엔 흘러넘치는 죽음에 이른다. 이처럼 이안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들었던 사람들의 모습에 묘한 회의감과 동정심을 느껴온듯 했다. 

<색, 계>는 그러한 이안 필모그래피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서로 진영과 의중을 감추고 만난 두 남녀. 그렇게 시작된 적과의 동침. 서로가 서로의 임무였지만 진짜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그 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전개. 멜로적 감수성이 결합된 그동안의 첩보 장르 영화들에서 이는 종종 표현되어온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거기에 노골적인 성애 묘사와 함께 두 남녀가 서로를 욕망하는 간절한 눈빛을 더함으로써 그 진부한 소재와 전개에 깊이를 더한다. 제작 시기가 비슷한 <어톤먼트>에서 조 라이트가 그랬듯, 이안은 <색, 계>에서 상대가 앉아있고 또 누워있던 침대 이불보의 자락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허망한 모습을 통해 그 짧다면 짧고 깊다면 깊었던 사랑의 진심을 관객들이 가늠할 수 있도록 돕는다. 거기에 양조위의 눈빛은 확실한 어시스트를 제공하고. 

야한 걸 넘어 거의 노골적으로 까지 느껴지는 몇 번의 섹스 장면. 단순하게는 도대체 이게 왜 필요했을까- 의문이 든다. 하지만 섹스는 실존이지 않은가. 그리고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가장 육체적인 언어 활동 아닌가. 사랑은 섹스라는 육체적 방식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또 그러므로 섹스는 실존주의적이다. 고로 사랑은 실존한다-라는 단순한 진리로 <색, 계>는 질주한다. 아마 기술적으로도 영화 역사에 남을 섹스 장면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 너머 인물들의 감정과 이야기의 주제까지 끌어안았다는 점에서 <색, 계>의 섹스 묘사는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 

2시간 하고도 40여분을 더해 완성된 영화의 런닝타임. 개인적으로는 일이 많은 요즘이라 짧은 런닝타임의 영화 위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색, 계>를 통해 뻔하다면 뻔한 깨달음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영화를 잘 만들면 런닝타임 그딴 거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것. 좀만 보다 자려고 했었는데 어느새 2시간 40분이 순식간에 지나있었다. 이 시기의 이안이 다시 보고 싶다. 120FPS라는 기술에 홀려 전전긍긍하고 있는 듯한 요즈음 이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3D 기술에 빠져 몇 십년을 헤맸던 로버트 저메키스가 떠올라 괜시리 씁쓸해진다. 

핑백

  • DID U MISS ME ? : 헌트 2022-08-17 11:10:21 #

    ... 수도 있는 장르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일종의 멜로 드라마로써 제작된다. 인물들 사이 관계와 그로부터 촉발되는 감정의 격랑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장르라는 거다. &lt;색, 계&gt;의 주인공 왕치아즈는 매국노 이를 암살하기 위해 그에 접근하지만 결국 사랑을 느끼고 임무에 실패한다. 또한 &lt;타인의 삶&gt; 속 주인공 비즐러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