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3 10:32

파프리카, 2006 대여점 (구작)


꿈이 인간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이라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멘트다. 인간 무의식의 반영. 그러니까 인간이 느끼는 사랑과 동경, 욕망 등의 감정들이 모조리 담기는 그릇이 바로 꿈인 것. 곤 사토시는 그 꿈이란 그릇으로 애니메이션과 영화 테크닉의 정점에 섰다. <파프리카>가 당신의 취향이 아닐 수는 있어도, 그것이 구현해낸 기술적 가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거란 이야기. 

거의 애니메이션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미지의 향연. 그 자체로 <파프리카>는 충분히 의미있다. 중년의 남성들이 건물 옥상에서 도미노 마냥 기쁘게 투신하는 이미지, 살해 당한 남성이 해파리 마냥 흐물흐물 거리며 슬로우 모션으로 낙하하는 이미지 등은 오묘하게 아름답다. 하지만 곤 사토시의 재능이 드러나는 건 비단 이미지 구성에서 만이 아니다. 그의 진정한 진가가 증명되는 순간은 이미지의 구성이 아니라, 그 직조에서 온다. 이 컷과 저 컷을 이어 붙이고, 또 저 컷과 그 컷을 연결해내는 방식. 곤 사토시는 다차원적인 꿈의 레이어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편집'이라는 행위 자체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관객들 앞에 전시 해낸다.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꿈을 공유한다는 설정, 꿈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몇몇 핵심 장면들의 시각적 유사성 때문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파프리카>를 너무 많이 따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일정 부분 혹할 만한 주장이지만, 만약 놀란이 <인셉션>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 <파프리카>를 참고 했다면 오히려 덜 반영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이 꿈 저 꿈 사이를 마구 돌아다니는 장면 같은 건 <인셉션>에서도 했을 법한 연출이었다는 거지. 특히 파프리카가 이 간판 저 간판 사이를 넘나들며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다니는 묘사 같은 거. 이건 진짜 완벽한 아이디어와 멋진 연출 아니냐. 하긴, 애초 놀란은 그런 시각적 충격보다 내러티브적 완성도에 더 관심이 있었겠지만...

특히나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종종 가졌던 경향인데,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부러 불쾌감을 주는 연출이 <파프리카>에도 꽤 많다. 뭔가 대놓고 징그럽거나 노골적으로 공포스런 장면까진 없거든? 근데 그냥 기분이 이상해. 인형 여러 개가 무더기로 쌓여있는데 거기 눈깔 돌아가는 장면이라거나... 이건 그냥 대놓고 공포잖아? 마지막에 흑막 빨아먹으며 성장하는 주인공 이미지도 멋진데 뭔가 기괴함.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곤 사토시가 너무 일찍 떠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가 만든 영화들을 모두, 그것도 많이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서도 여러 영화들을 통해 영화적 테크닉에 일찍 통달했던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아쉬울 수 밖에 없는 거지. 이 영화도 어느새 벌써 16년 전 영화다. 세월 참 짧은 여름밤 꿈같이 빠르다. 

덧글

  • 잠본이 2022/02/23 13:53 # 답글

    원작 소설의 지리멸렬함을 생각하면 그 천재성이 두배로 아쉬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책을 갖고 저런 영화를 만들수가 있었는지(좋은 의미로)
  • CINEKOON 2022/03/28 13:07 #

    원작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어 비교가 어렵지만, 하여튼 역동적으로 대단한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 잠본이 2022/03/28 13:14 #

    http://zambony.egloos.com/3637029
    안 읽으셔도 별로 손해는 아닐 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슴다(...)
  • 서린 2022/02/24 01:49 # 답글

    천재죠. 명감독은 많지만 천재다 싶은 사람은 드물죠.

    이제와서 생각하면 왠지 김기덕하고 느낌이 비슷해요.
  • CINEKOON 2022/03/28 13:07 #

    너무 일찍 갔어요
  • 나인테일 2022/02/24 04:13 # 답글

    파프리카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오랬동안 기억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기사랑 2022/02/24 13:24 # 답글

    걸작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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