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8 11:34

첨밀밀, 1996 대여점 (구작)


시작부터 뚱딴지 같은 소리지만 난 운명을 믿지 않는다. 우리네 만남과 이별이 모두 저 하늘 윗편 어딘가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힘 좀 써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그건 너무 힘빠지지 않는가. 하여튼 개인적으론 운명을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운명'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멜로 드라마란 장르까지 내가 구태여 거부할 필요는 또 없지. 귀신과 악마의 존재를 굳이 믿지 않아도 오컬트 장르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만남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게 아니었다는 말. 운명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 말이 품은 소중한 절박함은 사람들의 마음을 뿌리채 흔들어 놓기에 더없이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멜로 드라마 장르의 영화들 중 <첨밀밀>은 특히나, 그 '운명' 자체가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군림하게 된 경우일 것이다. 소군과 이요의 사랑은 운명이었다. 그들은 넓고 둥근 이 세상에서 하필 홍콩이라는 곳에 함께 당도 했고, 선형적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이 시간과 세월 속에서 하필 1986년 함께 존재했다. 그들은 맥도날드에서 만났고, 짧은 대화를 했으며, 이어 깊은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몇 번의 크고 작은 사건들 끝에 결국 이별한 둘. 하지만 운명은 그들을 그냥 갈라두지 않는다. 홍콩에서 피어오른 그 사랑은 뉴욕에서 몇번의 엇갈림을 겪다가, 결국 그 곳의 어느 작은 쇼윈도 앞에서 다시 맞붙는다. 

서로를 향한 둘의 사랑이 간절한 것도 있었겠지만, 이건 어떻게 봐도 운명이란 비인위적 존재가 그 둘을 서로에게 당겨주었다고 볼 수 밖에. 때로 세상은 그 둘을 떼어놓기 위해 척력을 발휘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순간마다 그 둘을 다시금 붙여놓는 것은 운명의 인력이었다. 사실 둘이 미친 사랑의 노래를 부른 것은 맞거든. 본토에 약혼녀 두고 온 소군이 홍콩에서 이요와 그렇게 지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후 그 약혼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홍콩으로 건너온 상황 임에도 소군이 결국 그 사랑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모든 걸 넘어 너무 못 됐다. 어찌보면 이기적일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때때로 사랑은 '이기'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인데 그걸 어찌 마냥 모른척 할 수 있겠어. 사회에 길들여진 우리는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그 이기를 대부분 포기하고 산다. 하지만 소군은 그러지 못했던 거다. 약혼녀를 속이고 또 스스로를 속이며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던 거다. 

소군과 이요라는 두 분신을 통해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운명이란 존재. 대부분의 멜로 드라마들이 다 그렇지만, <첨밀밀>이야말로 운명의 강대한 힘과 그로인한 애틋한 순간들을 잘 전시해내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당신이 운명을 믿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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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동감 2022-11-27 15:51:24 #

    ... 모습은 왠지 모르게 짠했다. 원래 멜로 드라마라는 건, '운명'을 무기화하는 장르 아니던가.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날 거야-라는 무기. &lt;첨밀밀&gt;이나 &lt;시간 여행자의 아내&gt; 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lt;동감&gt;은 반대로, 그 '운명'이 주인공들에게 가혹한 체벌로써 작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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