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예르모 델 토로는 자신의 취향을 숨긴 적이 없었다. 그는 괴물들의 제멋대로 솟아난 울퉁불퉁 외형을 애정 했고, 철컥 소리를 내며 육중하게 기동하는 거대 로봇들에 탐닉했다. 그러면서도 예술, 특히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열렬히 고백해왔던 그. 그런데 그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에는 괴물이 없다. 로봇도 없고, 외계인 역시 없다. 하지만 사람은 있다. 짐짓 행복해 보였고, 기뻐 보였고, 욕망 가득해 보였던. 그러나 점점 욕망에 이끌려 아프고 기이한 생명체, 즉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 <나이트메어 앨리>를 통해 길예르모 델 토로는 괴물의 이유를 드러내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포일러 앨리!
영화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땅 속에 묻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불태우기 까지 하는 한 남자의 이미지로 시작된다. 그렇다. 주인공인 스탠턴은 시작부터 살인자로 소개되고 있다. 재밌는 건 영화 전반을 통해 그가 왜 '그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변명해준단 점이다. 그는 <추격자>의 지영민처럼 그저 재미와 희열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부류가 아니다. 그가 죽인 건 그의 아버지였으나, 동시에 그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입장에서 그 살인은 일견 이해가 된다. 물론 살인 행위 자체를 정당화 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합리화 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장르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그의 그 살인 행위 자체가 어느 정도는 이해 된다- 이 소리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묻고 불 태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살인 행위 자체는 결코 정당화 되거나 합리화 될 수 없는 법. 그 살인 행위는 스탠턴 캐릭터 자체가 아슬아슬하고 흔들흔들 거리는 불량하고 불안한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암시한다. 애초부터 죄를 저지른 사람인데, 그 훗날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는 거지. 살인 행위 직후 우연히 들어가게된 카니발에서 그는 짐짓 성실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나, 그게 관객들의 마음에 안정감을 줄 수 있을리 없다. 언젠간 몰락 하겠지, 언젠간 무너지겠지-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밖에.
그리고 영화가 그 불안감 조성을 꽤 잘 해냈다. 솔직히 말해, 길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들 중 최고작이라 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길예르모 델 토로라는 감독이 갖고 있던 기존의 작가주의적 면모가 덜 드러나고 있기도 하고, 잘 연출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긴 해도 어쨌거나 영화의 전반부가 너무 길다는 인상 역시 존재 하거든. 하지만 때때로 어떤 영화들은 서사나 그 리듬 보다, 특유의 '분위기'에 집중하곤 한다. 당장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왕가위의 영화들. 특히 <화양연화> 같은 거. 그 영화에 신선한 서사가 어디있어, 그냥 탁월한 비주얼 감각으로 불도저 마냥 관객들 마음을 밀어버린 거지. <나이트메어 앨리> 또한 비슷하게 느껴진다. 누아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특유의 풍미, 브래들리 쿠퍼를 위시한 여러 명배우들 각자가 품고 있는 개개인의 향기 등이 함께 어우러져 영화를 쥐고 흔든다. 두시간 반짜리 긴 영화인데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
여기에 길예르모 델 토로의 작가주의적 면모가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잠깐이나마 반짝인다는 점 역시 중요 포인트. 솔직히 말해, 국내 포스터카피가 말하는대로 영화사에 남을 엄청난 결말이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뻔하기도 했다. 전반부 카니발 장면에서 그 기인에 대한 묘사를 길에 늘어뜨릴 때부터, 어쩌면 스탠턴이 그 꼴 나며 영화가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예상을 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그 뻔한 결말이, 길예르모 델 토로가 감독하고 있는 영화의 그것이기에 묘한 시너지를 내뿜는다. 그는 언제나 괴물에 대해 말해왔던 사람 아니었는가. 그것도 항상 '사연있는 괴물'에 끌려 왔지. <나이트메어 앨리>의 괴물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던 어떤 '사람'이다. 그리고 델 토로는 거기에 두 시간 반짜리 전사를 부여해 낸거고. 근데 또 살인자의 범죄 행각들을 합리화 시켜주는 영화는 아니었다는 거. 엄청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그저 비극일 뿐이었다는 시각을 견지해내거든. 무엇보다 스탠턴이 영화 오프닝부터 살인자로서 소개되기도 했고. 그냥 '딱하다'는 느낌 정도지,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단 생각까진 안 듦.
분위기로 조지고 부시는 영화. 길예르모 델 토로의 비 괴물 영화를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좀 적응이 안 되면서도 신기하고 그런다. 하지만... 토토로 아저씨, 다음 작품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당신은 괴물과 로봇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때 가장 멋있어. 이 양반 엎어진 영화가 한 둘이 아니잖아...
덧글
virustotal 2022/02/28 23:06 # 답글
CINEKOON 2022/03/28 1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