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언가 가려져있는 듯한 과거를 숨긴채 깊은 숲속에서 돼지와 함께 살아가는 남자. 돼지는 킁킁대며 트러플 버섯을 찾고, 남자는 그런 돼지에게 맛있는 요리로 보답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하고 잠잠하기만 하던 그 남자의 삶에 불청객들이 끼어들어 그 돼지를 훔쳐간다. 생계의 수단이자 유일한 벗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남자. 남자는 피를 뚝뚝 흘리며 도시로 향한다. 오로지 자신의 돼지를 찾겠다는 일념 하에. 근데 이게 웬걸, 그저 인생 실패자에 불과해 보였던 그 남자를 대면하는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기 바쁘다. 이게 얼마 만이냐 말하며, 그동안 어디 있었냐 물으며. 대체 이 남자는 누구였던 것일까.
내용 설정을 듣고 <존 윅>을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영화도 엄청난 과거를 뒤로한채 은퇴 했던 남자가 소중한 강아지 하나를 잃고 현역으로 복귀하는 내용이었으니. 때문에 <피그>를 오해한 측면도 있었다. 난 진짜로 주인공이 도시에 들어서서 못해도 총질 한 두 번 정도는 할 줄 알았거든. 이쯤 되면 <존 윅>에 뇌가 절여져 있었다 고백해야 하나. 하여튼, 여러모로 <존 윅>이 안 떠오를래야 안 떠오를 수 없는 영화인데, <피그>는 그를 노골적으로 이용해 먹고 있다. 뭐랄까, <존 윅> 덕분에 가타부타 더 설명을 더하지 않는 측면도 분명 있었던 것 같음.
존 윅에게 강아지가 그런 의미였듯이, 로빈에게도 돼지는 자신이 잃은 옛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뿐이랴, 돼지는 그의 옛 사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옛 직업이기도 하고 또 그의 옛 영광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로빈에게 있어 돼지는 그 자신의 과거를 상징하는 셈. 그리고 그런 로빈 펠드가 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 최고의 무기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미키 루크 캐스팅을 통해 <더 레슬러>의 정수를 만들어냈다면, <피그>의 감독인 마이클 사노스키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통해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빚어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어떤 배우인가. <더 레슬러> 이전의 미키 루크가 걸었던 길을 유사하게 걷고 있는 배우 아니던가. 빛나는 황금기가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각종 B급 영화에 출연하며 스스로의 커리어를 망쳐왔던 남자. 더 이상 메이저 배우로 다시 올라설 수는 없을 것이란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을 받아왔던 배우. 그런 니콜라스 케이지의 실제 과거는 <피그>의 로빈 펠드와 무겁도록 짙게 공명하고 만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로빈 펠드가 하는 대사 "진정으로 소중한 건 쉽게 얻을 수 없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입을 빌어 새어나오기 때문에 유효한 것이고 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외모를 떠나 그 역할을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피트가 대신 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파급력이 있을 수 있었을까? 가장 높은 곳도, 가장 낮은 곳도 모두 맛봐본 산전수전 베테랑 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 대사는 관객들 마음에 더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도 그 대사가 존재하는 레스토랑에서의 장면이다. 아마 그 장면은 사회를 겪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돌덩이처럼 쿵-하고 들어가 무겁게 앉았을 것이다.
미스테리를 다루는 방식이 건조하고 담백해 오히려 극대화 되는 측면이 있고, 여기에 자신의 과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꺼내와 쓴다는 방식 역시 깊은 울림을 준다. 다만 1부의 전환점이 되는 지하 싸움터 장면은 좀 맥이 빠졌음. 니콜라스 케이지가 누구 줘패는 걸 보고 싶었던 게 사실이긴 하나,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지금은 너무 허무하게만 연출되어 있는 것 같다. 뭐, 하지만 오랜만에 국내 공식 수입된 니콜라스 케이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냥 만족. 성우로서의 참여이긴 했지만 최근 <크루즈 패밀리 - 뉴 에이지>도 그렇고 이후 나올 작품들도 그렇고 어쩌면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될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 부디 이 기세 쭉 타고 나가 다시 잘 됐으면.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