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도너의 <슈퍼맨>과 더불어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대작. 아담 웨스트 버전의 극장판을 제외하면 공식적인 첫 실사 배트맨 무비. 더불어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도무지 만들어지기 어려운 기획이었다. 배트맨이야 DC의 간판 캐릭터이니 슈퍼맨 다음으로 실사 영화가 만들어지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감독이 누구인지 보라. 팀 버튼은 지금이야 거장 취급을 받는 감독이지만 이 영화에 참여할 당시엔 그냥 생짜 신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전작이 액션 영화였던 것도 아냐. 바로 그 <유령수업>였다고. 그런데도 워너는 <배트맨>의 감독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여기서 더 놀라운 것 한가지. 다른 캐릭터도 아니고 주인공인 배트맨 역할에 마이클 키튼 기용 했던 거... 키튼 역시 지금이야 최고의 배트맨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 배우지만 당시엔 배트맨 보다 조커에 더 가까워보이는 비틀쥬스를 연기했던 사람이잖아... 당시 마이클 키튼의 떨어지는 이름값 때문에 상대 역할인 조커에 잭 니콜슨을 캐스팅했단 이야기 역시 너무 유명하고. 하여튼 당시에 이걸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부분들이 많다. 지금 보면 그걸 그냥 선견지명이라 포장해야 하나 싶어지기도 하고.
<에이리언>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배트맨> 시리즈 역시 주기적으로 달라지는 감독 릴레이 덕분에 매편마다 그 분위기나 뉘앙스가 확연히 달라진다. 그리고 그 스타트를 끊은 팀 버튼의 <배트맨>은 그야말로 감독 본인의 표현주의적 감각이 제대로 덧칠되어 있는 아트 명작. 여러 시대착오적 분위기들이 혼재되어 있는, 그 '양식'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 고담시의 전체 풍광은 하나의 거대한 박쥐성 또는 고딕 마굴로 표현되고, 그 안을 돌아다니는 고담 시민들의 옷차림은 영락없는 금주법 시대의 그것. 여기에 건물들 역시 유럽의 고딕 양식. 하지만 그와중 배트맨이 사용하는 무기들은 하이테크 첨단 무기들이고... 여러 시공간을 뛰어넘은 요소들을 하나의 양식으로 묶어둔 것, 어찌보면 그것이 팀 버튼 <배트맨>의 에센스다.
재밌는 점. 배트맨 보다 조커가 더 주인공에 가까워보인다는 점. 조커는 원작에서 그 기원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캐릭터인데, <배트맨>에서 만큼은 오리진 스토리의 기승전결이 지 혼자 뚜렷하다. 반면 수퍼히어로이자 진짜 주인공인 배트맨은 그 오리진 스토리가 오히려 잘 나오지 않음. 배트맨으로서의 모습이 먼저 등장하고, 브루스 웨인의 과거 이야기는 역으로 미스테리가 밝혀지는 형식. 당시 담당 배우의 이름값도 있었겠지만, 확실히 팀 버튼은 배트맨 보다도 조커에 더 관심 있었던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보며 느낀 건데 확실히 조커의 부하들 대우가 꽤 괜찮았던 것 같긴 하다. 부하들 표정이 하나같이 다 좋아보여. 특히 박물관에 깽판 놓는 장면에서는 다들 일종의 예술적 희열까지 느끼고 있던데. 대우가 좋았다기엔 그냥 막 죽이잖아...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 크리스쳔 베일이 잠못 이루는 신경과민증 환자로서 브루스 웨인을 표현했다면, 마이클 키튼은 뭐랄까 일종의 정신분열증 환자에 더 가까운 듯한 인상이다. 분열된 자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느낌. 근데 그게 또 과하진 않고. 사실 여기 배트맨도 베테랑은 아니다. 고담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더라도 그저 도시 전설쯤으로만 치부하고 있음. 범죄자들 역시 그의 존재를 다 헛소문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래서 그런 건지, 이쪽 배트맨 은근히 싸움 못한다. 뭔가 여유는 있는 것 같은데 은근히 조커 부하들한테도 많이 얻어 맞는 편이고. 하긴, 뭐... 베테랑 본새 내뿜는 건 발 킬머나 조지 클루니, 특히 벤 애플렉처럼 설정상 배트맨 활동 연차 좀 쌓였을 때 이야기지.
배트맨 못지 않게 조커 이야기를 해야할 거다. 실사 영화 기준 여섯번이나 바뀐 배트맨이지만 조커 역시 네 번이면 결코 적지 않은 거니까. 여기 조커는 예술가인데다 명사수다. 사정거리는 업그레이드했다 쳐도 어떻게 리볼버로 배트윙을 잡을 수 있냐는 거지. 암만 생각해도 그린 애로우 뺨치는 것 같음. 하여튼 그거는 그거고, 현재까지 실사 영화로 옮겨진 네 명의 조커들 중 가장 예술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조커.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쇼로써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아니고, 그냥 진짜로 그 자체에 흠뻑 젖어든 느낌의 자아도취형 싸이코패드가 이쪽 조커다. 뭘해도 결국 다 장난으로 이어질 것 같은 느낌. 그와중 프란시스 베이컨 만큼은 진지하게 대하는 게 개그.
일생에 걸쳐 삶과 죽음의 테마를 동화적으로 그려왔던 팀 버튼. 그래서였을까,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 못지 않게 이 세계의 배트맨도 사람들 꽤나 죽이고 다닌다. 물론 잭 스나이더처럼 그걸 직접적으로 다 보여주는 케이스는 아니지만, 솔직히 범죄 소굴에 들어가 그 건물 자체가 풍비박산 날 정도의 폭탄을 터뜨렸는데 상식적으로 사람이 한 명도 안 죽었겠냐고... 더불어 클라이막스 성당 전투에서는 불량배 나부랭이들 떨어져 죽든 말든 진짜로 신경 안 씀. 애초 전투기 타고 조커에게 기관총 난사하는 것부터가 불살 따위 신경 안 쓴다는 반증 아니겠나.
배트모빌, 배트포드, 더 배트까지. 3부작 내내 한 편당 탈 것 하나씩만 감질나게 던져주던 크리스토퍼 놀란과는 다르게, 팀 버튼은 후속작 따위 염두를 아예 안 했던 건지 뭔지 첫 편부터 배트모빌과 배트윙 모두 다 낭낭하게 챙겨 보여준다. 디자인은 진짜 끗발나게 잘 뽑음. 하지만 개인적인 선호도로는 글쎄, 여기 배트모빌은 타고 다니면 허리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누가 태워준다고도 안 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전반적으로 잘 뽑은 <배트맨> 실사 영화 시리즈의 첫 편.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독의 테이스트가 아주 아주 짙게 들어간 작가주의적 영화. 그런데 엄청 흥행했어. 그래서 워너는 팀 버튼을 조르고 졸라 그를 속편 감독 자리에도 앉히게 된다. 원하는 거 다 하라고 그렇게 팀 버튼을 떠밀어 줬는데... 속편에서 팀 버튼이 진짜로 원하는 거 다 할 줄은 아마 워너도 몰랐을 거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뱀발 - 극중 종군 기자로 나오는 비키 베일이 과거 코르토 말티제의 군사 쿠데타를 취재했단 언급이 나온다. 코르토 말티제는 최근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스타피쉬 프로젝트 가동했던 그 국가임.
덧글
rumic71 2022/03/08 16:25 # 답글
CINEKOON 2022/03/28 13:05 #
SAGA 2022/03/12 13:02 # 답글
CINEKOON 2022/03/28 13:06 #
잠본이 2022/03/14 10:44 # 답글
코르토 말테제는 60년대 이탈리아 그래픽 노벨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더군요.
https://www.khan.co.kr/article/200804041654395
국내에도 잠깐 소개되긴 했는데 별로 주목을 못받아 듣보잡 처지(...)
CINEKOON 2022/03/28 13:06 #
잠본이 2022/03/28 1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