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3 12:54

배트맨 리턴즈, 1992 대여점 (구작)


돌아온 팀 버튼의 고담시는 그 첨탑이 더 뾰족하게 섰다. 악당도 두배, 배트맨의 고민도 두배, 팀 버튼의 표현주의적 색깔도 두배! 근데 흥행은 두배 못함. 

2022년 현재 기준으로 지금까지의 팀 버튼 필모그래피를 모두 살펴보았을 때, 진정한 팀 버튼 월드의 완성으로 그중 딱 세 작품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필모그래피 전반기의 <가위손>, 그리고 후반기로 넘어가는 기점인 <빅 피쉬>.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꼽고 싶다. 쉽게 말해 DC 코믹스에서 파생된 배트맨이란 캐릭터보다, 팀 버튼의 색깔이 훨씬 더 깊고 진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이 <배트맨 리턴즈>라는 이야기. 때문에 원작이나 전작 속의 수퍼히어로 장르적인 색채를 기대하고 본 사람들은 실망했을 것이고, 이와 반대로 팀 버튼의 우울한 표현주의적 비전이 맘에 들었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충분히 즐겼으리라. 심지어 시간적 배경도 크리스마스야. 여기서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떠올리지 않기란 정말로 어렵지. 

박쥐옷을 두른 정신분열증 환자와 광대 분장을 한 싸이코패스가 서로 엉겨붙었던 전작의 고담시. 그 기조를 이어받아 고담시는 더더욱 미친놈들 천국이 되었다. 표면적인 악당은 펭귄과 캣우먼까지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자본가형 악당 막스 슈렉의 존재를 빼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펭귄과 캣우먼이 배트맨의 안티테제라면, 막스 슈렉은 브루스 웨인의 안티테제이기 때문. 실제로 슈렉은 브루스 웨인과 기업가 대 기업가로 한 번 맞붙기도 한다. 캣우먼과의 관계가 강조된다는 점 역시 그 둘 사이의 공통점.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결국 펭귄과 캣우먼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펭귄은 그냥 그렇게 태어난 인물로서 묘사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 될 수 밖에 없는 인물 정도였지만, 펭귄은 그냥 태생적으로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거라고. 배트맨으로서의 정체성을 취사선택한 브루스 웨인과는 달리, 펭귄은 그럴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그는 날 때부터 괴물이었으며, 고아였고, 또 야만인이었다. 그러다보니 감독인 팀 버튼의 애정을 듬뿍 받은 캐릭터이기도. 수퍼히어로 보다 수퍼빌런의 사연에 좀 더 귀를 기울였던 방식은 전작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속편들어 더 심해졌다. 애초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가 펭귄의 것이다. 결말도 혼자 제일 씁쓸하게 죽고. 아무래도 팀 버튼은 어지간히 펭귄에게 마음이 갔던 모양. 

셀리나 카일은 뭔 수퍼 파워를 얻었다거나 단기간 수련을 했다거나 하는 설정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잘 싸우는 걸까. 그냥 영화적 허용으로 봐야겠지만 그냥 그걸로 퉁치고 넘어가기엔 너무 잘 싸움. 벽도 잘 타고... 여기에 진짜로 목숨이 아홉개쯤은 있는 것으로 묘사 되기도 한다. 팀 버튼 특유의 도시괴담 분위기를 이양받은 인물. 이 미셸 파이퍼의 캣우먼 이후, 할리 베리와 앤 헤서웨이 등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해왔듯이, 나 역시도 현재까지 최고의 캣우먼은 미셸 파이퍼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캣우먼에 대한 할리 베리 버전의 해석은 애시당초 터무니 없다. 도둑인데다 투사고, 그 강인한 외양 이면에 숱한 상처들을 애써 가린채 사는 인물인데 비키니만 입고 고담시 뒷골목을 설치는 게 말이 되냐고... 그에 비한다면 <배트맨 리턴즈>에서 보여지는 캣우먼에 대한 미셸 파이퍼의 해석은 꽤 그럴듯하다. 그 의상부터 동작, 표정까지. 물론 이쪽도 원작에 비한다면 좀 더 팀 버튼 색이 짙긴 하지만.

배트맨이 마냥 정의를 원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단 점 역시 포인트. 버튼버스의 브루스 웨인은 자경단 활동으로 고담시에 정의를 가져오고픈 사람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배트맨 활동은 그가 가진 일종의 정신적 만족 행위인 것. 아마 고담시의 범죄가 모두 척결되면 그거대로 또 아쉬워할 것 같은 인물. 대표적인 게 펭귄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이다. 물론 누가 봐도 펭귄 엄청 수상하게 보이지.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정말이지 집요하게도 펭귄의 뒤를 캔다. 여기에 배트맨 수트 입고 펭귄 앞에 나타나 뚜벅뚜벅 걸어오는 장면은 일종의 스토커처럼 느껴지기도 함. 잊지 말자. 버튼버스의 고담은 여전히 미친놈들 천국이라는 걸...

기대에 크게 못 미쳤던 흥행 탓으로, 팀 버튼의 배트맨 월드는 이쯤에서 마무리 되게 된다. 이후 조엘 슈하머의 버전이 속편으로써 이어지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크게 다른 터라 한 시리즈로써의 동질감은 잘 안 느껴지는 편이고. 어쨌거나 단 두 편만에, 팀 버튼은 배트맨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몇 가지 것들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고담시 디자인은 확실히 버튼버스 압승이거든. 여기에 <배트맨 리턴즈> 속 불세출의 명장면이라 생각하는 무도회 장면까지. 모두가 가면을 쓰고 만나 춤을 추는 무도회였지만, 여기에서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은 두 인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브루스 웨인과 셀리나 카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둘은 이미 가면을 쓴 상태였다. 브루스 웨인과 셀리나 카일이라는 가면을 쓴 배트맨과 캣우먼. 펭귄도 배트맨에게 말하지 않나, 어쩌면 이미 얼굴 자체가 가면인 자신을 네놈이 부러워하는 것 아니냐는 일갈. 다른 건 몰라도 팀 버튼이 그거 하나만큼은 잘 집어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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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잠본이 2022/03/14 10:34 # 답글

    버튼판에 익숙해지면 원작 펭귄(그냥 좀 땅딸막한 연미복 아저씨. 기형 아님)이 엄청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죠...
    캣우먼은 확실히 따지고 들면 말이 안되는데 아무도 딴죽안걸 정도로 카리스마가 기막혔다는 얘기
  • CINEKOON 2022/03/28 13:04 #

    하긴 그렇습니다, 이 작품 내에서의 묘사를 빼면 원작에서나 게임에서나 펭귄의 캐릭터성이 이 정도로 부각된 적은 크게 없어서.
  • SAGA 2022/03/27 21:29 # 답글

    어렸을 때 슈퍼맨 같은 영화인 줄 알고 별 생각없이 빌려봤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더랬죠... 확실히 초딩에겐 어려운 영화였...
  • CINEKOON 2022/03/28 13:05 #

    리차드 도너의 분위기와는 완전 정반대의 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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