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3 13:11

배트맨 포에버, 1995 대여점 (구작)


출동 직전, 샌드위치 싸가겠냐는 알프레드의 말에 차 타고 가면서 드라이브 스루로 사먹겠다는 배트맨의 첫마디. 여기서부터 이미 새 제작진이 세운 이 영화의 새 기조가 딱 보인다. 대놓고 만화적이고, 대놓고 유쾌하게 가겠다는 것. 그게 통했느냐는 다른 이야기지만...

그게 버튼버스든, 놀란버스든, 스나이더버스든 간에 브루스 웨인은 언제나 배트맨 활동에 진심이었다. 근데 그 중에서도 특히나 슈마허버스의 브루스 웨인이 가장 진심인 듯. 이 양반은 월레스와 그로밋 마냥 자기 회사 사무실에서도 바로 배트맨으로서 출동할 수 있게끔 책상 아래에 미끄럼틀도 설치해뒀음. 그 시내 회사에서부터 시 외곽 자신의 저택까지 단숨에 돌파할 수 있는 초고속 봅슬레이도 구비해뒀는데 이게 대체 얼마냐... 돈도 돈인데 이거 다 언제 지었어... 보안 때문에 공사 인력 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1편의 킴 베이싱어, 2편의 미셸 파이퍼에 이어 3편에는 니콜 키드먼이 존재한다. 그녀가 연기하는 건 체이스 메리디언 박사. 다중인격에 대해 연구하는 정신분석학자인데 최근 고담시로 부임. 하... 듣기만 해도 군침이 싹 도노. 박쥐옷을 입고 밤마다 설치는 이중인격 분노조절장애자와 매사 모든 걸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는 이중인격 강박증 환자, 여기에 남한테 수수께끼 푸는 맛으로 사는 유아적 과대망상 환자가 함께 모여사는 도시라니. 전세계의 정신분석학자들과 관련 의사들에게 고담시는 시간과 정신의 방처럼 느껴질 거다. 존나 힘든데 버티기만 하면 논문이랑 연구 존나 할 수 있음. 

1편2편에 비해 액션은 확실히 많아졌다. 하지만 그게 재밌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일단 대놓고 만화적인 색채로 가다보니 대놓고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많다. 적어도 몇 톤은 나갈 게 분명한 강철 금고를 혼자서 단단히 지탱하는 배트 갈고리의 위엄이라든가... 이건 뭐 아다만티움제인가? 여기에 리들러가 진짜 웃김. 이 새끼는 시작부터 미친놈으로 나온다. 아니, 보통 제아무리 악당이라도 수퍼빌런으로 각성하기 전 일반인일 때는 사람 죽이거나 상해 입히는데에 최소한의 내적 갈등이나 고민을 하기 마련이잖아. 근데 여기 리들러는 이미 미쳐있어서 그딴 거 없음. 그냥 맘에 안 들면 바로 상사 뚝배기부터 깨는 것. 허나 그게 또 짐 캐리의 리들러면 그래도 될 것처럼 느껴진다. 이미 표정과 몸짓부터가 미쳐있어서... 

아무래도 확실히 리들러라기 보다는 그냥 짐 캐리에 더 가까운 듯한 인상이다. 배트맨 세계의 수퍼 악당으로 리들러가 등장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고담시로 놀러온 짐 캐리를 보는 기분. 그러다보니 짐 캐리 얼굴 개그 보는 맛이 없진 않은데, 악당으로서의 카리스마는 확연히 떨어진다. 그렇다면 토미 리 존스의 투페이스가 뭔가를 해줬어야 했는데... 이 양반은 이름대로 반쯤 미쳐있어서 뭐 할 의욕이 없어 보이고. 

그리고 이 때부터 등장한 로빈의 위엄. 서커스의 공중 곡예 장면으로 로빈의 기원을 담아준 것까지는 오케이인데, 그 이후 이 캐릭터를 잘 쓰진 못했던 것 같다. 로빈으로 각성하게 되는 계기도 너무 갑작스럽고. 무엇보다 애새끼가 호감이 안 감. 제아무리 가족이 모두 죽어 상심이 큰 상태라 해도 집안에서 생쑈하는 건 너무 웃기지 않나? 특히 로빈 빨래 쑈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구경거리. 세상에 마상에 대체 누가 집에서 빨래하는데 그딴 식으로 하냐고... 아, 이건 좀 딴 소리인데 크리스 오도넬은 세바스찬 스탠 닮은 것 같다. 

발 킬머 배트맨은 나쁘지 않다. 다만 배트맨보다 브루스 웨인에 좀 더 잘 맞는 느낌. 다행히 이쪽은 리들러에 비해 배우의 아우라가 캐릭터를 잡아먹지 않는 편. 배트맨으로서 나름 입술이 마음에 들지만, 그래도 메리디언 앞에서 돌아서자마자 빙그레 웃는 건 좀 깨더라. 

어쨌거나 예전에 처음 봤을 땐 뭐 이딴 괴작이 다 있나 싶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기억하고 있었던 것만큼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영화. 아니, 나쁜 건 맞는데 못된 건 아니라고... 정말 못된 건 이 다음 영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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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잠본이 2022/03/14 10:29 # 답글

    회사에서 바로 배트케이브로 직통이라니 좀 깨는 발상이긴 하네요(...)
    그 전설의 애덤웨스트 대인도 출동은 그냥 평범하게 저택 서재에서 책장 비밀통로로 들어가는데
  • CINEKOON 2022/03/28 13:03 #

    솔직히 보면서 정말로 월레스와 그로밋 콤비인 줄 알았어요
  • SAGA 2022/03/27 21:27 # 답글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무게감을 확 뺀 느낌이라 나름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만 다음 작품이 최악이라서 문제였지...
  • CINEKOON 2022/03/28 13:04 #

    확실히 취향의 문제이긴 하죠. 영화 자체가 막 나쁘다는 느낌은 없고... 뭐랄까, 팀 버튼 버전에 비하면 경공술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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