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4 17:57

배트맨 & 로빈, 1997 대여점 (구작)


이미 충분히 가족친화적이고 만화적이었던 전작 <배트맨 포에버>의 그 농도가 워너의 수뇌부에게 있어서는 아직 한참 모자라게 느껴졌나 보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엘 슈마허와 조지 클루니를 방패막이 삼아 결국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튀어나온 젖꼭지를 달고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배트맨. 그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배트맨은 서핑보드를 탄채로 밤하늘을 가르고, 포이즌 아이비를 두고 로빈과 연적이 되어 아웅다웅하며, 끝내는 많은 배트맨 팬들을 절망 상태로 몰아간 마성의 아이템 배트 신용카드를 꺼내 자랑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유효기간은 FOREVER!

사실 데이비드 에이어의 <수어사이드 스쿼드> 때부터 느꼈던 것인데, 워너는 자신들이 쥔 패의 진짜 가치와 진짜 재미와 진짜 의미를 잘 모르는 듯하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그런 영화였지 않았나, DC와 마블을 통틀어 사상 최초로 실사 영화화된 수퍼빌런 팀업 무비였으면서 정작 하는 짓은 그냥 전형적인 수퍼히어로 팀업 무비였던 것... 그런데 그 전통은 1990년대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배트맨 & 로빈>은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워너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 밖에 되지 않는다. 저리도 어둡고 모순적이고 딜레마가 강한 캐릭터를, 이리도 밝고 가볍고 쾌활하게만 만들다니. 물론 그 캐주얼한 느낌이 아담 웨스트 시절부터 존재했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당연히 배트맨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또 배트맨이라고 해서 마냥 어둡게만 묘사할 필요 역시 따지고 보면 없는 것이다. 한 캐릭터를 두고 여러 해석본이 존재하는 건 흥미롭고 좋지. 하지만 그게 근본적으로 어울렸냐 아니냐를 두고만 따진다면, <배트맨 & 로빈>은 그 방향성을 한참 잘못 잡은 게 맞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을 타겟으로 한 가족 영화이니, 꼬맹이들만 재밌게 봤으면 된 거 아니냐는 변명도 사실 통하지 않는 궤변이다. 실제로 그 어린 아이들이 정말 재밌게 보았는지 역시 문제지만, 그걸 차치하고 보아도 문제임. 왜냐면, 영화관엔 애들 혼자만 오냐? 애들은 당연히 부모나 삼촌, 이모 등의 성인 보호자들과 함께 오지. 그리고 '가족 영화'라며. 그럼 가족 구성원 중 꼬맹이 하나만 챙기는 것도 무책임한 거 아니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분노와 슬픔에 빠져 고담시를 빙하기로 돌리려 했던 그리스식 비극의 한 주인공, 미스터 프리즈는 그 이름만큼이나 썰렁한 농담만 던져대는 괴상하고 실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충만한 색기로 독액 마냥 치명적인 모습으로 원작에서 활약했던 포이즌 아이비 역시 키스로 죽이려고 발악하는 이상한 인간이 됨. 아니, 애초에 동물과 식물을 결합하려는 그딴 연구를 왜 하고 있었냐고... 그런 설명도 없이 냅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냄새부터 내고 있네. 하지만 베인에 비한다면 이 둘은 그나마 양반이다. 여기서의 베인은 그냥 근육 붙은 중간 보스 1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걸랑. 다행히 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손에 조금이나마 명예 회복을 하긴 했지만...

문제는 악당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공들에게도 하자가 있었다는 것. 그늘이 느껴지기는 커녕 그냥 현실 속 조지 클루니 그 자체의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최악의 브루스 웨인이자 배트맨은 물론이고, 로빈 역시 징징거리는 건 여전해 짜증난다. 그나마 무게감을 잡아주던 알프레드는 갑자기 위독하다는 설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여기에 멋대로 자기 조카를 낙하산 마냥 배트걸로 꽂아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대체 바바라가 배트걸 해야하는 이유가 뭔데? 얘 싸움 잘함? 아니다, 그 전에 싸울 이유부터 있기는 함? 왜 갑자기 수트 입더니 배트걸 행세하는 건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 웃긴 건 전작부터 이 영화까지 두 편 내내 배트맨과 로빈 수트에는 젖꼭지 달아놓고 정작 배트걸 수트에는 젖꼭지 안 달았다는 거. 이건 뭐야? 이게 오히려 성 차별 아냐? ㅋㅋㅋㅋㅋㅋㅋㅋ 차라리 통일성 있게 셋 다 젖꼭지 떼주든가... 

퇴폐적으로, 때로는 폭력적으로 까지 느껴지는 영화의 밝은 분위기 자체는 그러려니 해줄 수 있다. 정말로 백 번 양보해서. 하지만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위해 영화적 완성도를 포기했다는 뉘앙스는 용납이 안 된다. 세상에 쾌활하면서도 잘 만든 영화들이 얼마나 많냐. 근데 이딴 식으로 끝내면 안 되는 거잖아. 뭐, 세상사 다 그렇듯 이 영화 덕분에 몇 년이 지나 놀란이 <배트맨 비긴즈>로 시리즈에 재시동을 걸 수 있었으니 나름의 미덕이 있다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네. 


뱀발 - 가끔 그런 상상한다. 슈마허버스의 수퍼빌런들을 놀란버스의 배트맨과 페어링 시켜주고 싶다는. 이야, 짐 캐리의 리들러와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미스터 프리즈에 맞서는 크리스쳔 베일의 진지함 가득 배트맨이라니.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있었던 그 배트맨에게는 그들과의 만남 자체가 유효기간 FOREVER짜리 악몽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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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레고 배트맨 무비, 2017 2022-03-14 18:25:13 #

    ... 좀 워딩이 강할 수도 있는데, 조엘 슈마허의 &lt;배트맨 &amp; 로빈&gt;은 일종의 매음굴 같은 분위기까지 풍기는 기괴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분명 웃으라고 넣은 유머들일 텐데 정작 보는 이들의 입꼬리를 올리는 데까지 ... more

  • DID U MISS ME ? : 더 배트맨 2022-03-16 14:28:34 #

    ... 영화였지. 그에 이어 메가폰을 잡은 조엘 슈마허는 만화적, 그리고 가족친화적이라 쓰고 특유의 매음굴 분위기까지 풍긴다-라고 읽어야 하는 분위기로 시리즈를 일신 아닌 일신했다. 여기서 이어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은 배트맨에게서 표현주의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그를 그 밖의 사실주의로 내몰았으며, 짧게 집권했고 그마저도 결국 스스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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