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담 웨스트 버전의 TV 시리즈와 그 극장판을 제외해도, 이 영화까지 포함해 어느새 우리에겐 총 여섯명의 실사 배트맨이 주어졌다. 여기에 감독 역시 다양해 지금까지 그 고담시를 실사화 시킨 이도 벌써 다섯명. 물론 이번 영화 한 편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시간 역시 필요하겠지만, <에이리언>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그랬듯이 배트맨이라는 IP도 그 유명세 만큼이나 거쳐간 사람이 많았기에 어느 정도는 그들의 그 유산과 관련한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정리해보자면. 팀 버튼은 배트맨이란 캐릭터와 그의 세계를 팀 버튼이란 확고한 주형틀에 넣어 구운 표현주의적 제빵사였다. DC 코믹스 보다 팀 버튼이 끼친 영향이 더 컸던 것. 그러다보니 <배트맨>과 <배트맨 리턴즈>는 감독의 명성답게 가히 괴인들 파티라고 해도 손색없는 영화였지. 그에 이어 메가폰을 잡은 조엘 슈마허는 만화적, 그리고 가족친화적이라 쓰고 특유의 매음굴 분위기까지 풍긴다-라고 읽어야 하는 분위기로 시리즈를 일신 아닌 일신했다. 여기서 이어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은 배트맨에게서 표현주의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그를 그 밖의 사실주의로 내몰았으며, 짧게 집권했고 그마저도 결국 스스로 그 자리를 내려온 셈이 되었지만 잭 스나이더는 그 짧았던 순간에도 철저한 원작 고증과 분위기 반영으로 실사 영화를 그야말로 그래픽 노블화 시켰다. 성공한 영화도, 성공하지 못한 영화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 각각이 각자의 분위기와 해석으로 배트맨이란 캐릭터를 요리조리 뜯어보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일련의 긴 과정들을 거쳐,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 차례가 왔다. 그렇담 맷 리브스의 연출 방향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독한 탐정물이고, 또 히치콕과 핀쳐의 스타일을 적절히 응용하고 우라까이한 서스펜스 스릴러다. 게다가 중2병이라고 놀림받아도 할 말 없지만, 그럼에도 감독의 전작 <혹성탈출 - 종의 전쟁>에서 느껴졌던 특유의 무거운 진중함까지. 맞다, 나는 <더 배트맨>이 성공적인 배트맨 영화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몇몇 부분들에서는 <다크 나이트>까지 넘어선.
더 스포일러!
배트맨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배트맨이란 캐릭터와 고담시라는 공간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란 어렵다. 특히 배트맨. <더 배트맨>은 배트맨 외에도 캣우먼, 펭귄, 리들러, 고든 등 이미 유명한 여러 캐릭터들을 등장시켜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배트맨일 수 밖에 없다. 로버트 패틴슨의 새 배트맨, 새 브루스 웨인은 어떠한 인물인가. 버튼버스의 배트맨이 정신분열증을 겪는 환자로, 슈마허버스의 배트맨이 유쾌발랄 여유를 잃지 않는 영웅으로, 놀란버스의 배트맨이 세상 모든 짐 다 짊어졌던 책임감 가득한 투사로, 스나이더버스의 배트맨이 나이 먹고 희망과 활기를 모두 잃은 참전용사 등으로 표현 되어 왔다면, 맷 리브스 버전의 배트맨은 일종의 분노조절 장애를 앓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좋은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친부모가 이름모를 뒷골목의 범죄자로부터 목숨을 빼앗긴 이래로 그 한과 분노를 어디에도 풀지못해 될대로 되라며 누구 하나 쥐어패기 위해 밤거리를 터벅터벅 배회하는 인물. 버튼버스의 배트맨은 차라리 그 복수의 대상을 조커로 한정지어 주기라도 했지, 이쪽 세계의 배트맨은 여전히 그 사건의 진범을 알지 못해 마음 속에 쌓은 분노를 특정 개인이 아닌 고담시 뒷골목을 대상으로 요리조리 뿜어댄다. 그러다보니 <더 배트맨>에서의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 사이 비율은 거의 8:2 정도가 되어, 배트맨에게 그 분량이 더 몰려있다. 애초 이쪽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는 슈마허버스 속 배트맨과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함. 버튼버스의 배트맨은 셀리나를 살리기 위해 함께 살자며 그 가면을 찢어냈었고, 놀란버스의 배트맨 역시 배트맨으로서 은퇴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되니까. 그에 비해 이쪽 배트맨은 제아무리 2년차라곤 해도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다. 벤 애플렉의 브루스 웨인이 그랬던 것처럼, 배트맨으로서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바람둥이 이미지에 더 부채질을 한다거나 이런 것 역시 없고.
그렇게 스스로를 '복수'로 상정해가며 범죄자들 아구창을 후려치던 배트맨. 하지만 그 모습이 마냥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지 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단죄하려는 범죄자들에 더 가깝게 보이거든. 맷 리브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영화의 포문을 여는 오프닝은 다름 아닌 리들러의 것이었다. 고담 시장의 일상을 멀찍이서 망원경으로 훔쳐보던 리들러의 시점. 그런데 이 시점은 영화 중반, 배트맨이 셀리나 카일을 감시하던 망원경 속 시점으로 반복된다. 그러니까 남의 일상을 관음하고, 멋대로 단죄하며, 사법 시스템보다는 폭력으로 상황들을 해결하던 배트맨 역시 리들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중반부 이후 더 강조된다. 배트맨과 리들러는 모두 바닥에 자신의 계획을 그리는 사람들이며, 둘 다 부모를 잃은 고아고, 목적을 위해 폭력을 숭상하는 자경단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영화의 클라이막스 속 리들러 추종자의 대사를 통해 확인사살 된다. "나는 복수다"라며 배트맨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는 리들러들. 배트맨은 이 지점에서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왔던 행동들을 새로운 시점으로 보게된다. 아니,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직후, 배트맨은 자기 희생적 면모를 보이며 고담의 사람들을 구해낸다. 이제 막 선출된 새 시장과,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끔 만들었던 고아. 그렇게 배트맨은 고담 전체와 더불어 고담시의 미래, 그리고 자신의 과거까지 모두를 물 밖으로 건져낸다. 이 깨달음을 통해 더욱 강조되는 부분이, 바로 초반부 지하철역 장면. 배트맨은 뒷골목 깡패들로부터 한 남자를 구해내지만, 그 남자에게 마저 괴물 취급을 당하며 씁쓸해 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통한 자기 희생 직후는 어떤가.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의지하게 되고, 들것에 실려 이송되던 한 여자는 배트맨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하기에 이르지 않나. 복수만을 되뇌이며 폭력을 행사하고 다녔던 복수의 사도가, 자신의 얼터 에고와 싸운 뒤 정의의 사도로 재탄생하는 과정. 다른 건 몰라도 <더 배트맨>이 그 측면 만큼은 제대로 짚은 게 사실이다. <배트맨 비긴즈> 이후로, 수퍼빌런 엔트리 보다 더 주목받게 된 주인공 배트맨의 위엄. 이게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다. 확실히 맷 리브스가 지도자의 성장을 그리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전작인 <혹성탈출 - 종의 전쟁>의 주인공 시저도 그런 인물이었으니.
그에 반해 수퍼빌런들이 아쉬운 측면은 분명 있다. 사실상 캣우먼의 이야기는 모조리 들어내거나 다른 인물로 바꿔내도 전혀 상관 없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다만 탐정물로써의 전환을 선언한 배트맨 영화이니, 이왕 용의자 로스터 만들 거 유명한 수퍼빌런들로 꽉꽉 채워보자는 욕심 역시 나였어도 했을 거라 그닥 원망스럽지는 않다. 어차피 이런 고전 탐정물 분위기의 영화라면 팜므파탈 나왔어야 하잖아. 그럼 그냥 지나가는 고담의 여성 시민 1로 가는 것보단 당연히 캣우먼이나 포이즌 아이비를 먼저 떠올리겠지. 내가 제작진이었어도 그랬을 거다. 그럼에도 브루스와 셀리나 사이의 로맨스 라인은 좀 더 단단하게 묘사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 물론 지금 버전도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역시 또 아니다. 둘은 분명 동질감을 느꼈을 거다. 둘 모두 고아고, 모종의 이유로 가면을 쓴채 밤거리를 배회하는 인물들이니. 여기에 영화 바깥에서 로버트 패틴슨과 조 크라비츠 두 배우가 쌓은 묘하게 섹슈얼한 이미지 역시 한 몫 했을 것이고. 그러니까 둘이 하는 몇 번의 키스가 아주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란 소리. 그저 좀만 더 설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것 뿐.
펭귄과의 자동차 추격전은 하드보일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매우 만족스럽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 마냥 무식한 속도와 스펙터클로 승부보려는 게 아니라, 그 변속과 리듬으로 끝장내려드는 카 체이스라 더 좋았다. 그 뿐만 아니라 대체로 액션들 역시 모두 만족. 다만, 오히려 크게 기대한 측면이었던 리들러와의 수수께끼 대결이 기대했던 것보단 다소 약하게 느껴져 아쉽다. 리들러의 수수께끼 다 대체로 재미있기는 했는데, 그 상대인 배트맨이 너무 똑똑해 버려서 오히려 싱겁게 느껴진다. 관객으로서는 당연히 '와, 이 수수께기의 답은 뭘까?!'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 생각이 채 예열 되기도 전에 배트맨이 별다른 해설 없이 답만 딱 하고 던져주는 상황. 조금 유치해졌을지언정 그 수수께끼들에 대한 해설을 배트맨이 탐정으로서 좀 해줬으면 이런 아쉬움은 안 들었을 것 같다. 아, 그래도 제프리 라이트의 고든이 너무나도 유능한 형사라 그 부분에서는 또 만족. 게리 올드만의 고든에 비해 묘하게 좀 더 현장 근무자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버튼버스의 고든에 비하면 게리 올드만이나 제프리 라이트나 둘 다 엄청 유능한 것.
버튼버스의 고담시는 놀이동산 안 유령의 집 같았고, 슈마허버스의 고담시는 그 옆의 롤러코스터 같았다. 막상 살면 엄청 힘들겠지만, 그래도 왠지 한 번쯤은 살아보고픈 느낌의 공간이었달까?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지. 반면 놀란버스와 스나이더버스의 고담시는 너무 전형적인 미국 대도시 느낌이라 그냥 관광 한 번 정도 가보고 싶었지. 그러나 이번 <더 배트맨>의 고담시는 그야말로 범죄마굴이다. 비는 항상 추적추적 내리고, 뒷골목엔 쓰레기와 인간 쓰레기들이 팽배해있는. 이제껏 실사화 된 고담시들 중에서는 가장 '살기 싫은 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배트맨 영화에서 그건 칭찬이지. 그 지옥같은 분위기를 구현해낸 프로덕션 디자인과, 또 그를 특유의 장르적 분위기로 담아낸 그레이그 프레이져의 촬영이 예술. 다른 건 몰라도 진짜 촬영이랑 미술 쪽은 칭찬할 수 밖에 없다.
단점이 아주 없는 영화라 할 수는 없을 것. 분명 런닝타임 3시간은 과했다고 생각한다. 많이 줄이자는 것도 아니고, 한 15분 정도만 덜어냈어도 충분히 영화적 리듬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또, 분명 다음 편의 새로운 조커로 부임하게 될 베리 키오건의 캐릭터 역시 그 소개 방식이 조금은 아쉽다. 다음 편 악당을 예고하는 방식은 여전히 <배트맨 비긴즈> 말미 조커 카드 정도가 최고라고 생각함. 지금부터 너무 다 보여주는 것 같아 좀 그렇잖아. 하지만 그 정도의 소소한 단점들을 제외하고 본다면 내게는 거의 완벽했던 영화. <다크 나이트>는 그냥 훌륭한 영화였지. 하지만 <더 배트맨>은 훌륭한 '배트맨 영화'라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어쩌면 더 높게 평가할 수도 있겠고. 3편까지 계획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분위기대로 쭉 잘 만들어서 그냥 한 6편까지 만들어도 너무 좋을 것 같다. 다음편의 수퍼빌런 엔트리는 어떻게 짜여질까? 이미 소개한 이상 조커가 안 나오기란 힘들 것 같고... 로버트 패틴슨이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이런 분위기라면 올빼미 법정도 좋을 테고, 매드 헤터 정도 역시 서브 빌런으로 괜찮을 듯. 아니면 허쉬나 데드샷? 베인이나 미스터 프리즈, 포이즌 아이비, 킬러 크록 등은 아무래도 액션 위주로 상대할 수 밖에 없는 악당들이니 그닥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뱀발 - 앤디 서키스의 알프레드는 너무 젊고 너무 강해보여서 <레고 배트맨 무비>의 알프레드 마냥 배트맨과 함께 현역으로 뛸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덧글
잠본이 2022/03/17 09:05 # 답글
CINEKOON 2022/03/28 13:02 #